[이슈&트렌드/주애진]농촌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1일 03시 00분


슬로 라이프를 다룬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포스터.
슬로 라이프를 다룬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포스터.
주애진 경제부 기자
주애진 경제부 기자
쨍쨍한 가을 햇볕 아래 밀짚모자를 쓴 20대 여성이 혼자 벼를 벤다. 요령껏 벼를 한 묶음씩 짚으로 엮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모습이 ‘프로 농사꾼’이다. 지난해 키운 쌀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내년 먹을거리를 수확하는 여성의 얼굴은 평화롭다. 모리 준이치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의 한 장면이다.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 이 영화는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는 슬로 라이프를 다룬다.

주인공 이치코는 잠시 도시에 나가 살다가 고향인 고모리에 돌아왔다. 혼자 농사를 지으며 직접 키운 벼, 토마토, 고구마 등으로 소박한 음식을 만든다. 여름에 수유 열매를 따서 잼을 만들고 가을이면 햇밤을 조려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제철 음식을 즐기는 이치코를 보면 ‘귀농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최근 도시의 삶에 지쳐 농촌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난달 25∼27일 열린 ‘2017 A FARM SHOW―농림식품산업 일자리 박람회’를 찾은 수만 명의 방문객도 귀농을 꿈꿨다. 이곳에서 만난 한 30대 여성은 3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고 귀농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정착할 장소. “귀농하는 사람 대부분이 고향에 내려가더라고요. 그런데 전 고향이 서울이라 딱히 근거지라고 할 만한 곳이 없어요.”

생각해 보면 유명한 청년농부 중에는 부모의 농업을 이어받은 사례가 많다. 본보가 소개한 경북 안동시 ‘부용농산’의 유화성 대표(34), 경북 상주시 ‘쉼표영농조합’의 이정원 대표(32·여), 전북 김제시 ‘강보람고구마’의 강보람 대표(26·여) 등은 모두 고향에 터를 잡고 농사로 성공했다. 고향이 아니더라도 그냥 마음에 드는 지역에 정착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이름만 들어본 마을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은 도심 속 작은 농촌을 찾아 나선다. 서울을 포함한 자치단체들이 운영하는 체험농장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친구나 가족끼리 작은 텃밭을 분양받아 감자, 가지, 고추, 상추 등 작물을 기른다. 스스로 키운 채소를 먹으면서 짧게나마 자연을 접하고 여유를 느낄 수 있다고 도시농부들은 말한다. 도시에서 찾은 슬로 라이프인 셈이다.

지방도시에서 자란 기자는 어릴 때부터 ‘서울행’을 꿈꿨다. 하지만 10여 년을 서울에서 살다보니 이 도시의 매력보다 단점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세련된 빌딩숲은 어느덧 삭막하고 답답한 풍경이 됐다. 활기차 보였던 도심의 북적거림은 정신없는 소음으로 변했다. 언제부턴가 공기 좋은 곳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하지만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농사일에 도전할 자신은 없다.

귀농이 너무 무겁다면 귀촌도 가능하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 ‘주말엔 숲으로’에 나오는 하야카와는 우연히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이벤트 당첨 선물로 받고 농촌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한다. 일본 도쿄의 무시무시한 주차료를 감당할 수 없어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 그는 농촌에서 텃밭을 가꾸지 않고 근처 슈퍼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택배를 이용한다. 원래 직업인 번역 일을 그대로 하면서 틈틈이 이웃들에게 영어나 기모노 입는 법을 가르친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소박하고 느린 농촌의 삶에 적응하는 하야카와를 보면서 깨달았다. 농촌에서도 도시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으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매일 숲을 거닐며 하야카와는 목적지에 닿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운다. 슬로 라이프란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고 먼 삶의 방식이 아니다.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
#슬로 라이프#영화 리틀 포레스트#2017 a farm show―농림식품산업 일자리 박람회#강보람고구마#귀농#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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