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경리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통영우체국에서 잠시 일하다 결혼했다. 이듬해 시인 유치환과 시조시인 이영도가 통영여중 동료 교사로 처음 만났다.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편지 5000여 통을 20년간 보냈는데, 처음 6년여 동안 통영우체국을 이용했다. 그 편지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로 출간되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유치환, ‘행복’)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역 군인 특례입학으로 미시시피대에 진학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다. 두 학기를 다니고 자퇴한 포크너는 생계를 위해 1921년 말부터 3년간 바로 그 대학의 구내 우체국장으로 일했다. 대학 구내 우체국이지만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곳이어서 늘 바빴다. 포크너는 “2센트 우표 달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우체국 일을 그만두었다.
작가 찰스 부코스키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취직한 우체국에서 보조 집배원으로 시작하여 12년간 일했다.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해고 직전까지 간 끝에 전업 작가의 길로 나서 내놓은 첫 장편은 ‘우체국’(1971년)이었다. “3년 후, 나는 정규 집배원이 되었다. 이 말인즉, 휴일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고, 일주일에 40시간 일하고 이틀 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행복한 건 아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가스통 바슐라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못 하고 전신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우체국에서 일했다. 그는 당시를 “과중한 우편 업무에 시달리면서 재정적 걱정도 늘 덫처럼 드리워진 시절”로 회고했다. 바슐라르는 주경야독하여 28세 때 수학·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중학교 교사가 되었고, 43세 때 소르본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집배원, 우체국, 우체통 등은 적지 않은 시와 노래,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집배원의 우정이 펼쳐지는 영화 ‘일 포스티노’, 김현성 작사 작곡의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 ‘바닷가 우체국’ 등이 있다. 하지만 집배를 비롯한 실제 우편 업무는 그곳에서 일한 적 있는 작가들이 말하듯 과중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도 집배원들이 1인당 평균 1160가구를 맡아 달린다. 일본은 378가구, 미국은 514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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