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바로 서야 명분도 서고 방향도 선다. 이것은 최근에 한국을 찾았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부드럽지만 따끔한 말로 우리에게 환기한 상식의 소리다. 그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눈에는 한국 여성들이 일본 파시스트들에게 당한 폭력이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당한 홀로코스트와 다를 바 없음에도, 한국인들이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어이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누구를 ‘위안’하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여야 한다. 사전은 ‘위안’을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이라고 정의하고, 다시 그 속에 있는 ‘위로’를 ‘남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푸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위로’의 결과물이 ‘위안’인 셈이다. 그래서 위안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강요하는 것이 되면 질서가 파괴된다. 언어의 질서, 윤리의 질서.
일제 파시스트들은 그 질서를 파괴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위안’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말을 왜곡해,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에게 ‘위안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한 이름을 만든 게 먼저고 폭력은 그 다음이다. 그렇다. 그들은 ‘위안부’라는 말부터 만들어 개념을 정립하고 그들의 전쟁기계를 위해 식민지 여성을 동원했다. 신체적 폭력이 있기 전에 언어의 폭력, 인식의 폭력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인식의 폭력이 담긴 말을 그대로 갖다 쓰며, 의도와는 달리 우리의 말과 정신이 그것에 오염되도록 방치한다. 초중고교 교과서에서도 쓰고, 책 제목으로도 쓰고, 어이없게도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할 때도 쓴다. 때로는 그냥 쓰고 때로는 인용부호로 가둬 쓴다. 인용부호로 가둔다고 그것이 갇힐까. 그럴 수 있다 쳐도,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무슨 수로 가둘까. 우리가 가둬놓지 않자 그 말은 급기야 다른 나라의 언어 질서까지 파괴하며 영어로는 ‘comfort women’이 되고 독일어로는 ‘trostfrauen’이 되었다.
가둘 수 있는 길이 아직은 있다. 폐기하면 된다. 나치에게 당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홀로코스트에 해당하는 말을 만들면 된다. 특별한 말일 필요도 없다. 그 말만 아니면 되니까. 치욕의 말은 그것을 만든 국가에 돌려주고 우리의 말, 우리의 스토리를 만들면 된다. 그러한 트라우마적 사건에도 치유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말, 그 스토리가 시작이다. 이것은 슈뢰더 전 총리가 우리에게 일깨운 상식의 소리이면서 공자의 말이기도 하다. 정명(正名). 이름을 바로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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