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출입을 시작한 뒤 처음 찾아간 정치인은 이정현 의원이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의 ‘대변인 격’이던 그는 ‘박근혜 전 대표 발언 모음(2004년 3월∼2008년 6월)’이라는 A4용지 343쪽짜리 문서부터 건넸다. 현안이 생길 때 공식처럼 비슷한 사례에 집어넣으면 ‘초짜 정치부 기자’도 박 의원의 향방을 유추할 수 있어 읽고 또 읽었다. 일종의 ‘박근혜 원론(原論)’이었다. 그 뒤 2권도 나왔다. 한 인물의 발언을 그렇게 좇아야 할 만큼 박 전 대통령의 말은 10여 년 동안 보수 정치권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한국당 의원들에게 그 존재감은 더 했을 것이다. 당이 위기에 처하면 ‘박근혜’만 쳐다봤다. 선거 때는 박 전 대통령의 일정팀을 통해 지역에 한번 들러 달라 읍소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보수 정당에선 ‘박근혜 없는 보수’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넘었다. 한국당도 박 전 대통령에게 자진 탈당을 권유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아직도 박근혜 얘기냐’고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또다시 꺼내든 이유는 한국당 의원들 사이 ‘박근혜 없는 보수’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다. 박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뒤 보수층을 붙들 무기를 아직 장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통 지지층의 이탈에 대한 불안감도 엿보인다. 출당 문제가 공식화된 뒤 한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의원은 “지금 한국당 지지율이 누구 지지율인 줄 아느냐. 박근혜 지지율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당이 해야 할 ‘박근혜와의 절연(絶緣)’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이 보수 정치에 남긴 오랜 폐단을 바로잡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그간 ‘책임 의식’을 비교우위로 내세웠던 보수 정당에 큰 상처를 냈다. 한 친박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자진 탈당이 보수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아니냐’는 물음에 “내가 속은 것 같다. 그럴 사람이면 탄핵 정국 이후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보였겠느냐”라며 한숨을 쉬었다. 친박계에서 책임지는 인사 한 명 나오지 않는 것도 계파 ‘오너’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
이보다 더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보수 정치 내 역동성을 없앤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지배한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새누리당(현 한국당)은 ‘공포정치’로 적막했다. 2015년 ‘유승민 사태’로 표출됐듯 다른 목소리는 곧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한 전직 청와대 참모는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적힌 시계를 의원들에게 몇 개 더 나눠주자는 건의도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기가 어려워 보고서로 썼다”고 털어놨다. 보수의 미래가 될 인물도 키우지 않았다. 정당 최고 지도자로서 역대 대통령이 모두 해왔던 역할을 방기한 셈이다.
그렇기에 ‘박근혜 없는 보수’는 비단 박 전 대통령의 당적 정리를 뜻하는 게 아니다. 뒤늦게 박 전 대통령을 출당한다고 국정 농단을 막지 못한 구여권의 책임이 자동 세탁되지는 않는다.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띠리리 리리리∼ 박근혜 없∼다”고 하는 ‘영구 개그’는 이제 국민들에게 안 통한다. 보수 정당은 이제 진정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박정희 보수’, ‘영남 보수’, ‘기득권 보수’와 같이 무언가에 기댄 보수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21대 총선도, 20대 대선도 아직은 멀찌감치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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