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미국 뉴욕 출국 길에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김동철 원내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협조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20일 뒤늦게 알려졌을 때다.
문 대통령 출국 직전까지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는 물 밑으로 대통령의 협조 전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상 거부의 뜻으로 이해됐다. 국무총리 인준, 정부조직법 개정 등 국회로 인해 정국이 꽉 막혔을 때도 문 대통령은 야당 의원에게 전화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국민의당 김 원내대표도 처음엔 대통령의 전화인 줄 모르고 안 받았다고 한다.
예상을 깨고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자 당청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국민의당을 향해 “골목대장 같다”고 비난했던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안 대표와의 회동을 제안했고, 안 대표가 이를 거부하자 국민의당 대표실까지 찾아갔다. 청와대는 정무수석뿐 아니라 여러 수석이 앞다퉈 국민의당 등 야당 의원들과 식사 회동을 요청하는 등 전방위적인 행동에 나섰다. 한 국민의당 초선 의원은 대법원장 인준 표결 직후 “이전과 너무나 달랐다”며 “대통령만 빼고 인연이 있는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의 전화를 셀 수도 없이 받았다. 국빈 대접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국정 운영에서 문 대통령에게 여의도 정치와의 ‘협치’는 적폐청산의 하위 개념으로 여겨진다. 대선 때 그는 ‘협치’의 상징으로 떠오른 연정에 대해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적폐를 제대로 청산한 뒤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집권 후에도 문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회가 새 정부의 발목을 잡더라도 촛불 민심의 힘으로 뚫고 가겠다는 의지를 종종 드러냈다. 청와대 참모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게 시민과의 직접 소통이고 ‘직접 민주주의’였다.
문 대통령은 예전부터 보스 정치, 밀실 담합 등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정치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득권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 이 때문에 당 대표 시절 중진 또는 계파 수장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었고, 그들의 정치적 기반도 흔들렸다. 언젠가부터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 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고, 문 대통령에게는 ‘정치력 부재’ ‘리더십 부족’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곳곳에서 경고등이 켜졌지만 문 대통령은 완강했다. 그는 20대 총선 공천을 앞둔 1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여의도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며 “여의도 정치문화에 오래 젖어 있는 분들은 기득권을 누려 왔기 때문에 변화해야 된다는 의지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제 물꼬는 트였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부결과 대법원장 인준 가결이 보여준 함의는 야당과의 협치는 필수이고, 협치를 이끌 동력은 문 대통령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야당이나 여의도 정치의 관행이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여당이 원하는 개혁을 위해선 무엇보다 국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권교체가 됐다지만 이는 행정부의 질서일 뿐 지난해 4·13총선의 민심으로 탄생한 20대 국회는 앞으로 3년은 유효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여소야대 환경 속에서 건강보험개혁법안을 관철시키고, 이란 핵 협상을 타결하고, 쿠바와의 국교정상화를 이뤄냈다. 하나같이 야당인 공화당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안들이다. 야당 의원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전화통 붙잡고 설득하는 정치로 거둔 성취다. 미국과는 정치 시스템이나 정치 문화가 다르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문 대통령 역시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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