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법원장의 영문 공식 표기는 ‘치프 저스티스(Chief Justice)’다. 영어권 국가에서 대법관은 정의라는 뜻의 단어 ‘저스티스(Justice)’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치프 저스티스는 그런 대법관 중에 으뜸(長)이라는 의미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대법원장의 영문 표기가 치프 저스티스가 된 것은 2001년 기관 및 직위 영문 표기에 관한 내규가 제정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 대법원장의 영문명은 특별한 기준 없이 ‘프레지던트(President)’와 치프 저스티스가 혼용됐다.
대법원장 영문 표기를 치프 저스티스로 통일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회의 내용 등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장을 치프 저스티스라고 부르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정도는 추측이 가능하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대법원장은 대법원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프레지던트로 부르는 편이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연방대법관 인사권이 없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장은 대법관 인사권의 일부인 임명 제청 권한을 갖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장과 연방대법관의 관계에 비해, 우리나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사이는 태생적으로 수직적 상하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대법원장 직명을 표기하는 데 어떤 영어 이름이 더 어울리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우리나라 대법원장에게는 ‘제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큰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은 13명의 대법관을 임명 제청하고, 헌법재판관 9명 중 3명을 지명할 권한을 갖고 있다. 3000명가량 되는 전국의 법관 인사권도 쥐고 있다. 이를 토대로 대법원장은 마음먹기에 따라 사법 권력의 지형을 흔들 수 있고, 일선 법원 재판에도 간접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진보 성향 법관 모임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인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명을 보수 야당이 강하게 반대한 것은 대법원장이 지닌 그런 힘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의 26일 취임사에는 이 같은 우려에 대한 대답과 자신이 수행해야 할 대법원장 직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녹아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대목은 대법원장 권한을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으로 행사하겠다고 약속한 점이다. 김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의 권한 행사는 한 사람의 고뇌에 찬 결단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과 사법부 구성원의 의사가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사법부의 정점에 홀로 서 있지 않고, 늘 법원 구성원들과 어울려 소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법의 정치화’를 걱정하며 자신의 취임을 반대했던 이들의 우려가 기우임을 보여주겠다는 이야기다.
“전관예우가 없다거나 사법 불신 우려가 과장된 것이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다”라는 김 대법원장의 언급도 인상적이다. 그간 법원은 전관예우가 문제가 될 때마다 “전관예우는 오래전 이야기일 뿐”이라며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전관예우가 많이 사라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불신이 여전하다면 김 대법원장의 주문처럼 먼저 눈과 귀를 열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옳다.
권성동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김 대법원장의 취임식이 끝나고 열린 축하 소연에서 “김 대법원장에 대해 우려가 컸지만 취임사대로만 하시면 더 바랄 바가 없겠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김 대법원장의 임명에 반대했던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김 대법원장이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권 위원장뿐 아니라 법원 안팎의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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