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는 초중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 외에 다른 책을 보지 못했다. 소설책을 읽었다거나 시를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 마을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학교에 도서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나는 아예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는데, 그때 학교로 월부 책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가지고 왔다. 그때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책을 샀다. 꼭 책을 읽으려고 산 것은 아니었다. 책이 멋져 보였다. 그러던 어느 심심한 날 나는 드디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동안 일곱 권이나 되는 그 책을 다 읽고 학교에 갔더니, 책을 파는 사람이 ‘헤르만 헤세’ 전집을 가지고 왔다.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데미안의 한 구절이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격정적인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친구가 없었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로 진입하면서 내가 사는 마을의 친구들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도시로 가버렸으니까. 내가 사는 작은 산골 마을은 그야말로 ‘알 속’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혼자 달을 보아야 하고, 별을 보아야 하고, 산을 그리며 내려온 눈송이들이 사라지는 강물을 홀로 서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때 벼락같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 문장이 바로 ‘새. 알. 깬다’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알을 깰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리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위로하며 그 문장에 매달려 살았다. 정말 나는 어느 날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갔다. 자유, 훨훨 날아가는 자유의 공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 이후 한 편의 시는 늘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내 고립의 탈출구가 되었다.
명문장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명문장이 오랜 세월 한 사람에게 명문장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날 그때, 그 시절에는 그 문장이 절체절명에서 자기를 구원한 명문장이 되었을지 몰라도, 세월이 가면 그 고색창연했던 문장은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세월은 간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신문에서 이런 글귀를 만나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은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아서, 구름이 허공에서 흩어지거나 모이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으며,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최초의 비평문학의 길을 연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의 글이다. 이 문장 중에서 제일 끝에 있는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라는 말이 지금도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당대에 빛나는 문장일지라도, 오랜 세월 그 문장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 사람 그 글은 어디에 숨을 길이 없다. 그 시대에 그 사람의 글은 이런저런 일로 포장되고 과장되고 과대평가된다. 자기편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가면 자기를 옹호하던 편도, 비판하던 편도 사라져 버린다. 글만 남는다. 글은 오직 진심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국물이 진국이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범위에서 명문장은 탄생되고 그 문장이 명문장으로 어떤 이에게 해석된다. 이인로의 글 중에 ‘모멸’이란 말은 글을 쓰는 이들에게 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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