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만에 추석과 함께 찾아온 기나긴 연휴. 전주 남부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나는 추석 연휴 3일을 제외한 다른 날은 모두 가게에서 일을 했다. 나는 테이블 네 개가 전부인 허름한 음식점을 운영한다. 프라이팬 하나로 볶음밥과 볶음요리 등 퓨전 볶음요리를 만든다. 요리 재료는 모두 음식점이 있는 시장에서 구한다. 요리를 하다가 재료가 떨어지면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 뛰어가 식재료를 사온 적도 많다. 재래시장인 이곳은 평소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새벽장이 설 때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데 특히 명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평소에는 대형마트를 가다가도 명절에는 재래시장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시장은커녕 마트도 거의 가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근처 가게에서 그때그때 사다 썼다. 시장의 매력에 눈뜬 것은 전주에 내려오면서부터다. 지금 재래시장은 나에게 없어선 안 될 고마운 일터다. 음식을 만드는 철학이 싱싱한 재료를 바로 다듬어 조리하자는 것인데, 시장이 근처에 없었더라면 실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장은 또 소통을 선물하는 고마운 장소다. 장을 볼 때면 가게 주인인 ‘어머니’들이 장사는 잘되는지, 어려움은 없는지를 늘 묻는다. 물건과 돈뿐 아니라 대화와 마음까지 오가는 것이다.
나와 내가 운영하는 가게를 찾는 단골들의 관계도 비슷한 데가 있다. 딱 음식만 맛보고 계산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음식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전주에 대한 정보도 주고받는다. 예전에는 음식이 과학이나 손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보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번엔 연휴가 길어서인지 유난히 관광객들이 붐볐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들, 아이들에게 어렸을 적 시장에 대한 추억담을 전하는 부모들이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단골들도 잊지 않고 가게에 발걸음 했다. 고향에 들렀다가 생각이 나서 밥 한 끼 하려고 왔다는 얘기를 들으면 지친 어깨가 금방 춤이라도 출 듯 힘이 난다.
인터넷과 모바일 쇼핑이 발달한 요즘은 물건 사는 게 참 편리해졌다. 시장은 분명 불편하다. 배달이 거의 없어 직접 장을 보고 물건을 가져가야 한다. 하지만 물건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고 고르는 과정은 무용하지 않다. 직접 고른 마침맞은 재료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
시장에는 아직 정(情)이 남아 있다. “시장에 오면 이런 맛이지” 하시던 어머니의 말을 이제 이해할 나이가 되어 그 정겨움이 더 느껴진다.
남부시장이 관광지로 통하는 게 가끔은 답답했는데, 단골들 덕에 그런 마음을 풀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이곳이 생각나 차를 돌렸다는 손님, 이곳에선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는 손님…. 어쩌면 시장은 소중한 이와 함께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머무는 자리. 함께한 사람들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 전통시장은 추억을 즐기고 앞으로의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김은홍
※필자(43)는 서울에서 일하다가 전북 전주로 옮겨 볶음요리 전문점인 더플라잉팬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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