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한국인 과학자 A 씨는 국내 한 연구기관과 공동연구를 진행키로 하고 계약서를 미국인 지도교수에게 들고 갔다. 이를 꼼꼼하게 읽어본 지도교수는 그 자리에서 계약 철회를 지시했다. ‘연구개발에 실패할 경우 자비로 비용을 물어내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A 씨는 “당시 미국인 교수님이 ‘너 정신 나갔느냐(Are you Crazy)?’면서 계약이 불합리하다고 화를 냈다”고 했다.
이 어이없는 조항이 국내에 지금도 살아있다. 얼마 전 알려진 국방과학연구소(ADD) 무인기 개발 중 일어난 사고가 이 같은 사례다. ADD 소속 연구원 5명은 2016년 7월 실험 중 사고를 일으켜 67억 원 가치의 실험용 무인기 1대를 잃었다. 방위사업청 방위사업감독관실은 이 사고에 대해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연구원 5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라”고 ADD에 통보했다. 67억 원을 5명이 나눠 1인당 평균 13억4000만 원을 물어내라는 의미다. 정해진 월급을 받는 연구자들에게 이런 큰돈을 변상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당시 방사청은 “항공기와 바람의 속도나 방향을 측정하는 ‘테스트 붐’의 회로를 거꾸로 연결해 비행기가 균형을 잃고 추락한 것으로, 이는 명백하게 연구원들의 실수”라고 지적했다. ADD 측은 “실험 중 일어난 실수로 고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방사청의 재심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항공우주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선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들의 주장은 타당하다. 연구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이를 검증하는 행위다. 항공기를 개발할 때 연구자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이 정도 설계면 이만한 성능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한 후,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제 성능이 나오는지를 확인해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가설이 항상 옳을 수 없을뿐더러, 세상에 없던 물건을 만드는 일이니 항공기 개발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시험비행 실패다. 그런데도 실패의 책임을 연구원에게 물린다면 앞으로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정확한 원인이 감춰질 가능성이 크다. 주어진 소임을 위해 실험에 매진했던 연구자를 빚더미에 앉게 하는 일은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아 보인다.
상황을 보다 못한 일부 연구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방과학연구소 무인기 추락 연구원 징계를 다시 심사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을 올리고 “(손해배상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실내실험만으로 개발한 군용무인기가 실전에서 제 성능을 낼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2일 올라온 이 청원에 추석 연휴 사이 1250명 넘는 사람이 동의를 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우주 분야 대학교수는 “정부는 연구비를 지급하면서 관행적으로 연구비 배상에 대한 조항을 넣고, 연구비가 부족한 과학자들은 설마 하면서도 사인하는 것이 당연시돼 있는 문화”라면서 “우리나라의 연구관리 및 평가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고 했다.
정부의 처지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국민 세금을 맡길 과학기술자가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도록 다소 강력한 조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계에서 실패란 성공의 자양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실패에서 배우기 위해선 연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성실 실패’와 ‘비리’를 구별해야 한다. 비리 행위는 엄벌해야겠지만 성실한 실패라면 보험과 안전기금을 마련해 실패에 따른 손해에 대비하는 새로운 제도를 검토해야 한다. 연구자들을 옥죄며 과학기술 발전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상식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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