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추석이 되면 아내와 함께 처가댁에 내려간다. 다행히도 처가가 경기도에 있기 때문에 오고 가는 것이 그렇게 고된 행군은 아니다. 이번 추석에 처가댁에서는 2박 3일을 머물렀다. 역시나 정상적인 활동 패턴이 되풀이됐다. 도착해서 밥 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서 또 밥 먹고, 밤에 낮잠보다 더 긴 잠을 자며, 그 다음 날에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했다. 물론, 연휴 동안의 이 일상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아내는 장모님이 요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청소도 하고, 송편도 내 눈에는 달인처럼 만들어대고, 장모님의 말 상대를 해드리며 쉼 없이 일했다. 가끔 나를 째려보며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손아래 처남을 가리키며 “똑같이 소파에 누워 있는 저 처남은 왜 나무라지 않느냐”고 말대꾸한다. 난 그 이유를 잘 안다. 처남은 3대 독자라서 집에서 아무 일을 안 해도 된다. 나도 외아들이기 때문에 (3대 독자까지는 아니지만) 처남과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설날, 추석마다 제일 힘들게 일하시는 분은 장모님이다. 식구들이 아무리 “쉬라 쉬라” 권해봤자 오직 요리만 하시고 음식을 계속 가져다주고 또 치우고 하신다. 내가 식사 후 밥상을 치우려고 손가락을 까딱만 하면 장모님에게 혼나고 만다. “사위는 가만히 있어!”
이런 이유로 TV를 보거나 책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TV가 문제다. 아내는 자기 형제들 중 막내라서 내가 리모컨을 거의 차지하지 못한다. 다수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볼 수밖에. 대개 그것도 끔찍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한번은 누가 실수로 TV를 교육적인 채널에 놔두어 나는 을사늑약에 관한 프로그램을 슬쩍 즐겨 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아, 이거 지루하다. 딴 데 틀어놓자”며 예능 채널로 바꿔 놨다. 내게 그 예능 프로그램은 너무나 지긋지긋했다. 개그맨, 개그우먼으로 구성된 패널이 나이 드신 6명의 여사들 가운데서 한 여배우의 진짜 시어머니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6명의 여사들이 모두 장기자랑을 하고 시어머니인 척 얘기하고. 아이고, 따분하다!
완전 공개하자면, 나도 한 번 예능쇼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년 전 설날에 KBS의 외국인 장기자랑에 나갔다. 사실은 한 번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능쇼는 약간 서커스 원숭이쇼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외국인이 나오는 예능쇼는 더 그렇다. 내가 보기에 외국인을 TV에 나오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과 한국어, 한국 문화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나라와 언어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외국인을 등장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인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 자체가 나쁘진 않다. 나도 나중에 한번 무슨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는다면 엉겁결에 응할지도 모른다.
외식을 각별히 싫어하시는 장모님 덕분에 2박 3일간 거의 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가족들과 모두 헤어진 날, 약속이나 한 듯 나와 아내는 저녁을 먹으러 수제 햄버거집으로, 다른 가족들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난 다음 날 호주로 출장을 가야 해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추석 연휴가 길어서 많은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들었다. 달라진 명절 풍경이다. 내가 떠난 날은 추석 이틀 후라서 솔직히 공항이 그렇게 붐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깨지고 말았다. 여전히 많은 가족들이 수속을 위해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지금의 한국 추석은 옛것과 새것이 혼재되어 있다고 본다. 3대에 걸친 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정성껏 차례를 지내는가 하면 주문한 음식으로 간단하게 치르거나 차례를 생략하기도 하고, 아예 온 가족이 해외로 나가 잠시나마 한국은 잊고 이국적인 정서를 맘껏 즐기니 말이다.
나에게 있어 몇십 년 후의 추석 명절은 너무 궁금하다. 누가 알아? 설마 로봇이나 복제인간이 차례를 지내는 동안 우리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을지. 여전히 외국인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TV 특집쇼에 나와 혀가 꼬인 채 “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 어쩌고 저쩌고” 말하고 있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