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수용]우리는 외국인을 몰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2일 03시 00분


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업체 셸의 제퍼슨 에드워즈 매니저는 지난달 초 나를 만나 “한국 정부가 채택한 친환경 에너지정책을 지지하며, 국민과 잘 소통하면 정책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외국 기업 임원에게서 우리 정책에 대한 응원과 조언을 듣게 될 줄 몰랐다.

“한국의 에너지정책 변화는 셸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는 폴 다시 쉘코리아 사장의 부연 설명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탈원전 정책으로 부족해지는 전력을 LNG와 신재생에너지로 메우겠다고 한 정부의 계획이 외국 LNG 사업자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외국 기업은 보수, 진보라는 이념을 따지지 않고 경영에 영향을 주는 정책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 사회가 탈원전 정책을 두고 소모적 공방을 벌이는 사이 셸은 순발력 있게 경제적 득실을 계산해냈다. 심지어 이 분석은 현 정부 들어 급조된 것이 아니라 50년 장기 시나리오 플랜에 근거한 것이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정교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시장에서 파이를 키워왔다.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정부가 이런 실태를 파악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동맹인 미국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은 여차하면 FTA를 파기하라는 트럼프식 ‘미치광이 전략’이 직접적인 원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는 거래의 기술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미국은 대통령이 외치는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정치적 구호가 절대적인 외교통상의 기준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가 트럼프처럼 미국 우선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고립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로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제국주의에 가까웠다. 미국인의 역사는 세계를 향해 ‘열린 국가’를 지향했고, 이들의 피에는 ‘용기만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개척정신의 DNA가 흐른다(폴 존슨, 미국인의 역사). 미국 재계는 한미 FTA 보존을 촉구했지만 줄다리기 협상 과정에서 이익을 양보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미국 기업은 벌써 이익 확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지난달 25일 에너지협력 세미나를 열어 “세계 2위 LNG 수출국인 미국이 한국의 에너지 수요에 기여해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미국산 LNG 수입을 늘리면 무역적자가 줄어 트럼프의 한미 FTA 파기 압박도 감소할 것이라는 논리다. 미국 기업들이 영국의 셸처럼 한국의 LNG 수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우연일까. 영국 기업은 친환경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기업은 FTA 지속을 명분으로 LNG 수입을 늘리라는 은근한 압박을 시작한 셈이다.

한미 FTA를 지지했던 태미 오버비 미국 상의 부회장은 최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미국은 앞으로 협상에서 한국에 대해 서비스, 법률시장 개방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한미 FTA 개정에 대한 정부의 대처를 보면 헛발질 전략이었다는 의구심이 든다. 처음에는 재협상이냐, 개정협상이냐는 용어 문제로 논란을 겪다가 공동조사가 선행돼야 한다고 버티더니 이제는 FTA 파기 압박에 밀리고 있다. 일부 인사의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즉흥적 대응이 연쇄 부작용을 초래했다. 모두 우리가 미국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에 갔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국제신용평가기관 글로벌 총괄 등을 만난다. 치밀한 전략을 짜둔 외국인들에게 펀더멘털(경제 기초체력)이 양호하다는 뻔한 얘기만 늘어놓다가는 국익에 마이너스가 될지 모른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친환경 에너지정책#에너지정책#한미 자유무역협정#한미 fta 재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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