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글’은 ‘길’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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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만 한양대 교수·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 교수·지식생태학자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 중에서》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글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는 이유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무관하게 글을 쓸 수 있고, 삶과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독자와 공감하기 어렵고 감동을 주기도 어렵다. 글과 삶은 하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삶이 바뀌지 않고서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자기다운 색깔이 드러나는 글, 살아온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진짜 글이고 글쓰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 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라는 충언을 전하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겠다는 치욕을 견디면 살 수 있다는 명분을 담은 글이다. 하지만 글은 글로서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나에게 글은 역시 길이다. 나의 글에는 내가 살아온 길이 있고, 살아갈 길도 있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길도 있다. 글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자 길이다. 글과 길, 그리고 삶은 하나다. 내가 살아가는 삶대로 글을 쓰고 쓴 글대로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글과 길과 삶은 따로 노는 객체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삼위일체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지 않고 글 쓰는 기법을 가르치는 글쓰기 과정은 어떤 면에서 무의미하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쓰기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그 사람의 글이 된다. 글쓰기는 그래서 애쓰기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메시지는 그 사람의 삶이 농축된 결정체다. 삶을 담은 메시지를 긁으면 글이 되고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진짜 나다운 삶인지를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겪은 스토리가 바로 창작의 원료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예술적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 창작의 기본은 기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창작하는 사람의 삶이 만들어 간다.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신영복의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에 나오는 말이다. 글은 테크닉을 연마해서 쓴 산물이 아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녹여내는 사고의 과정이다. 내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글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유영만 한양대 교수·지식생태학자
#이성복 시인#무한화서#삶#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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