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진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59)가 2일 한국인 최초로 독일 함부르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제8대 소장에 선출됐다. 2009년부터 ITLOS 재판관을 맡아온 백 교수는 2020년까지 3년간 재판소장의 임무를 맡게 됐다.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1996년 설립된 국제해양법재판소는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와 더불어 세계 3대 국제재판소로 꼽힌다. ITLOS는 해양경계획정, 어업 문제, 해양자원 개발 등의 분쟁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일에서 잠시 귀국한 백 소장을 11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
―소장 당선을 축하한다.
“개인적으로 영광이지만 막중한 책임을 맡게 돼 부담이 크다. 북핵으로 인한 한반도 안보위기가 심각한 상황이다. 국제기구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축하보다 걱정하는 말을 더 많이 한다.”
―2일 소장 선거는 어떻게 치러졌나.
“21명의 재판관이 교황 선출 방식으로 뽑는다. 재판관들은 각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후보자 이름을 종이에 적어 투표한다. 수년 전부터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로 소장으로 선출됐는데, 아시아에서는 몇 번째인가.
“세 번째다. 2대가 인도인이었고 6대가 일본인 소장이었다. 보통 5개 대륙별 그룹이 돌아가면서 소장을 맡는다. 전전 소장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사실 아시아 순서가 오려면 10여 년 기다려야 했다. 아주 예외적으로 다른 지역을 건너뛰고 제가 선출됐다.”
백 소장은 2009년 박춘호 재판관의 별세에 따른 보궐선거에 당선돼 재판관 직무를 시작했고, 2014년 9년 임기(2023년 10월까지)의 재판관으로 재선됐다.
“동수일 경우 소장이 캐스팅보트”
―소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재판관 21명의 일원으로 재판을 공정하게 이끌어야 한다. 재판은 단심제이며 보통 3년이 걸린다. 21명 전원일치 판결이 가장 무게가 있지만, 가능하면 다수가 동의하는 판결을 이끌어내도록 소장이 노력한다.”
―소장의 특권은 없나.
“의결할 때 재판관 한 명이 참석하지 못할 경우 10 대 10 동수 판결이 나기도 한다. 이때 소장이 캐스팅보트 권한을 갖는다. 소장은 표를 두 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지난해 ICJ에서는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니카라과-콜롬비아 해양분쟁에서도 그랬고, 태평양의 섬나라 마셜제도가 미국 영국 인도 파키스탄 등 핵보유국에 대해 ‘핵군축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제소한 재판에서 10 대 10 동수 판결이 나왔다. 그런데 두 번 모두 프랑스인 소장이 캐스팅보트로 결론을 냈다.” ―한국의 독도 문제가 국제해양법재판소에서 제소될 가능성은….
“소장으로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한국 정부는 어떤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제가 선출되니까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한국인이 소장이 돼 일본이 우려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제가 소장이 됐다고 해서 특정 국가에 유리하고 불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재판관에 취임할 때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판결한다는 선서를 했는데, 소장이 된 이상 더욱 회원국 모두에 공정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1996년 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됐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았으며 현재 168개 회원국이 소속돼 있다. 그러나 북한은 회원국이 아니다.
―북한은 유엔에 가입했는데 왜 회원국이 아닌가.
“ICJ는 유엔에 가입하면 동시에 회원국이 된다. 그러나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유엔해양법협약을 조인한 당사국만 회원국이 될 수 있다.”
―북한이 태평양 상공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는데….
“대기권 핵실험은 방사능 낙진 때문에 환경과 생태계, 인간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재앙이다. 이미 1963년에 미소 간에 육지와 해상에서의 대기권 핵실험을 금지했다. 프랑스가 1970년대 초까지 남태평양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해 호주와 뉴질랜드가 프랑스를 ICJ에 제소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북한의 태평양 상공 핵실험은 유엔헌장, 유엔해양법, 국제환경법 등 여러 조항을 명백히 위배할 소지가 크다.”
―북한이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미사일을 쏘고, 괌을 포위사격하겠다는 위협도 했다. 공해상에 미사일을 쏘는 것은 괜찮은가.
“북 ‘군사경계수역’은 불법”
“유엔해양법 301조에 ‘해양은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북한이 ‘공해의 자유’를 내세우지만, 미사일을 쏘는 것은 모든 국가가 누려야 할 공해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다. 특히 EEZ는 연안국에 자원의 탐사나 이용의 배타적인 권리를 허용하지만, 다른 나라에도 항해나 비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구역이다. 그런데 수역에 미사일을 쏘아대는 것은 연안국의 주권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1977년 동해에서 영해의 기선으로부터 50마일(약 80km) 내에 외국의 비행기와 배의 행동을 금지한다는 ‘군사경계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국제법에서 인정받는가.
“내가 1985년 세계해양법 연차총회에서 발표한 논문 주제가 바로 북한의 ‘군사경계수역’이었다. 전시(戰時)도 아닌 평시에 다른 나라의 항해와 비행의 자유를 제약하는 엄청난 크기의 수역을 선포하는 것은 국제법상 근거도 없고, 선례도 없다.” ―북한 리용호 외무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했으니 미국의 공격기를 영공이 아니어도 임의로 쏘아 떨어뜨리겠다고 했는데….
“양국 간의 말싸움 과정에서 나온 말만 갖고 국제법적으로 판단하긴 어렵다.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위험한 발언이 오해와 오판을 낳고, 우발적인 충돌로 이어지는 것이다.”
199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백 소장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법학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고, 1997년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제재판소에서 해양 분쟁이 가장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해양은 지구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전 세계 물동량 교역의 98% 이상이 해상운송을 통해서 이뤄진다. 바다는 특정 국가에 소속돼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만 통용되는 공간이다. 특히 21세기 들어 북극해를 비롯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심해자원 개발이 가능해졌다. 또한 해양은 ‘지구의 냉장고’로 불릴 정도로 생태계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가 관할권을 넘어서는 해저의 생물학적 다양성, 유전자원을 어떻게 보전하고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분쟁들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이 북한 핵 문제에 올인하는 사이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북핵이 핫이슈이지만 남중국해 분쟁은 여전히 굉장히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다. 강의할 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남중국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가 하면 ‘독도가 100개쯤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분쟁은 단순히 중국과 베트남, 중국과 필리핀 간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과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6개의 분쟁 당사국이 서로 치고받고 있는 상황이다. 다자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충돌 방지를 위한 신뢰 구축 조치도 필요하다.”
“차세대 국제법 전문가 키워야”
―해양 분쟁은 ICJ, ITLOS, 상설중재재판소(PCA) 등에 각각 제소할 수 있다. 어떤 차이가 있나.
“1969년의 북해대륙붕사건 이후 40년 가까이 국제사법재판소가 다룬 사건의 절반 이상이 해양 분쟁이었다. 그래서 1996년 해양 분쟁을 전담하는 국제해양법재판소가 생긴 것이다. 분쟁 당사국이 선호하는 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출범 후 가장 많은 해양 분쟁 재판을 맡아왔다.” ―국제재판소의 판결의 제재 수단이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하는데….
“국제재판소의 판결은 엄격한 구속력을 갖는다. 재판의 당사국들은 국제재판소의 판결을 수락하고, 이행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국내법처럼 경찰이나 집달관이 없기 때문에 강제로 집행할 방법은 없는 게 사실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문을 채택하고, 제재를 할 수도 있지만 안 지키면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판결을 지키는 것이 관행이다. 2주 전에 우리 재판소에서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간의 해양경계 재판 판결을 내렸다. 양국 간의 분쟁수역에 가나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었다. 판결이 끝나자마자 양국 장관들이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지역평화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백 소장은 “한국은 최근 조선, 해운에서 큰 위기를 겪고 있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해양강국”이라며 “특히 심해저 광물자원 개발 분야에서는 굉장히 앞서가는 선행 투자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대국이 힘을 겨루는 해양 환경에서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제법 분야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이 된 계기는….
“1996년 국제해양법재판소가 출범하기 전에 준비위원회가 있었다. 1990년부터 우리 정부 대표로 준비위원회에 참가해 오면서 나도 언젠가는 재판관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임이었던 박춘호 재판관이 임기 중 병환으로 돌아가셔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됐는데, 우리나라 후보로 제가 지명돼 선출됐다.” ―국제법 전문가를 양성하려면….
“대학 시절 국제법 국비유학생 제도 덕분에 미국 컬럼비아대 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국제법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어와 프랑스어도 잘해야 하고, 법률과 함께 각국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엔 로스쿨 제도가 들어선 이후 젊은이들이 점점 더 국제법을 기피하고 있다. 다들 국내법을 공부해서 판검사 되고, 로펌 변호사가 되는 목표만 세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사를 갈 수 없는 이상 지정학적 위치는 숙명이다. 통상국가인 한국에서 국제법 전문가를 키우는 것은 미래가 걸린 일이다. 소명의식을 가진 소수라도 계속 키울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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