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길진균]호랑이 등에 올라탄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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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균 정치부 차장
길진균 정치부 차장
얼마 전 추석 연휴 기간 중에 국회로 출근했을 때다. 밤늦은 시간까지 의원회관 사무실은 대부분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10여 년 전 국회를 처음 출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해마다 보게 되는 국회만의 추석 풍경이다.

당 지도부 등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회의원들에게 국정감사 기간은 한 해 농사의 성패를 가르는 수확철이나 마찬가지다. 의원들은 1년 동안 지켜보면서 정부 각 부처가 쉬쉬하는 정책의 실패 또는 문제점을 밝혀내고,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안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쓴다. 성공하면 능력 있는 의원, 밥값 하는 의원으로 인정받는다.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돼 국민에게 이름이나 얼굴이 노출되면 금상첨화다.

보좌진 역시 마찬가지다. 크게 ‘한 건’ 올린 보좌진은 몸값이 올라간다. 비서관에서 보좌관으로 승진하거나 다른 의원에게 영입 제안을 받기도 한다.

정치부 기자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국감 때가 되면 정치부 기자들에게는 e메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을 통해 매일 수백 건의 국감자료가 밀려든다.

살펴보면 놀랄 정도로 의미 있는 자료들이 꽤 많다.

“수도권 대학, 대학구조개혁평가 이후 정원 외 모집 늘어”(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

“방사능 오염물질, 인천 포항 등 고철업체에 방치”(자유한국당 김정재 의원)

“10년 미만 폐차, 관용차 46.7% vs 자가용 7.1%”(국민의당 박주현 의원)

16일 하루만 해도 이를 포함해 300건이 넘는 자료들이 e메일로 들어왔다. 주말 동안 의원과 보좌진이 밤을 새워 만든 자료들이다. 평소 같으면 신문 주요 면에 크게 다뤄도 손색이 없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너무나 많은 자료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이크가 큰 당 지도부나 일부 의원들의 정쟁으로 이들의 목소리는 파묻히기 일쑤다. 해마다 국감 무용론 또는 한계론이 제기되는 것도 매일 TV에 얼굴을 내밀고 상대 당을 비난하는 당 지도부와 국감장에서 고함치고 윽박지르는 일부 의원들의 ‘활약(?)’에 기인한 바 크다.

올해 국감도 마찬가지다. 요즘 국회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단어는 적폐청산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연일 적폐청산을 강조하고 있고, 이 프레임을 깨지 못한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아예 적폐청산 프레임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른바 ‘신(新)적폐청산’ 전략이다. 국회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온통 적폐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야가 각각 ‘적폐’로 규정한 과거 정부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제도 및 시스템을 정상화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여야 지도부는 문제 해결보다는 적대적 공생, 반정치 프레임 확산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이제 적폐청산이라는 호랑이 등에 함께 탄 형국이 됐다. 여야 지도부 모두가 나중에 호랑이 등에서 떨어져 물려 죽더라도 지금은 지지층의 군중심리에 올라타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잘 끌어가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처럼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웠던 노무현 정부 때 “운전사가 백미러를 보는 것은 앞으로 가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던 한 중진 의원의 말이 떠오른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추석#국회#국회의원회관#적페#적폐청산#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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