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서동일]쉽지만 어려운 ‘너의 이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7일 03시 00분


서동일 산업부 기자
서동일 산업부 기자
삼성전자 인공지능(AI) 플랫폼 이름 ‘빅스비(Bixby)’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유명한 다리 이름에서 가져왔다. 자동차 광고에도 자주 등장해 미국에서는 친숙한 단어다. 빅스비라는 사람 이름도 있는데 남성이나 여성을 가리지 않는 중성적 이름이다.

삼성전자가 빅스비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알파벳 ‘X’가 들어가서다. 음성인식 프로그램이 쉽게 알아듣는 알파벳이 ‘X’다. 그래서 아마존 AI 플랫폼 알렉사(Alexa)에도 X가 들어간다. 한국 사람이 V보다는 B 발음을 편하게 소리 낸다는 점도 고려했다.

KT는 AI 플랫폼 이름으로 ‘지니(Genie)’를 골랐다. 알라딘 요술램프 속에 갇힌 요정 이름이다. 언제든 말을 걸면 원하는 일을 해주겠다는 풀이가 손쉽다. 중국 알리바바도 AI를 지니라고 부른다. SK텔레콤 ‘누구(nugu)’는 ‘팅커벨’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AI가 개성이 강한 이름보다 보편적인 이름을 갖게 된 배경에는 ‘계속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기업들의 속내가 숨어 있다. 사람들이 말을 걸면 걸수록, AI를 자주 쓰면 쓸수록 이들은 더 많은 데이터를 쌓는다. 개개인의 데이터를 흡수하며 성장해야 결과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창업자 이름을 그대로 쓴 IBM ‘왓슨’, 게임 캐릭터 이름을 딴 마이크로소프트 ‘코나타’도 모두 같은 이유다.

AI들이 쏟아지니 신학기 새 친구를 만난 듯 기쁜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개운치 않은 기분도 지울 수 없다. 내 일상의 언어를 훔쳐 먹으며 커 나가는 친구들이라 그렇다. 기업들이 앞다퉈 내놓는 AI 제품 ‘가정용 스피커’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말을 빨아들이는 마이크’이기도 하다. 빅스비, 지니, 팅커벨 등 이름(호출어·wake up word)을 불러야 깨어난다지만 실눈을 뜨고 내 일상을 훔쳐갈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사용자도 모르는 사이 아이폰에 이동경로가 속속들이 저장됐던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이전에도 사용자 말을 듣는 휴대전화 소프트웨어는 있었다. “본부”라고 외치면 전화가 걸렸던 것처럼. 그러나 약속된 대화의 규칙을 벗어나 부르면 알아듣지 못했다. 스마트폰 등장 이전부터 나왔던 음성인식 내비게이션을 써본 사람이라면 ‘홈플러스 합정점’으로 말하면 알아듣고 ‘합정동 홈플러스’로 말하면 못 알아듣는 황당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AI는 이제 대화의 맥락(context)까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노래 누구 거야?” “그 사람 미국 사람이야?”라고 물으면 ‘그’가 누군지 이해할 정도로 AI는 성장했다.

AI는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지만 커나갈수록 산업계에 미칠 영향도 강력해질 것이 분명하다. 목소리만으로 무엇이든 조작할 수 있으니 애플리케이션(앱)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국 구성원 모두를 연결했다”고 자평하는 카카오톡이라고 영원할 수 없다. “6시까지 간다고 연락해줘”라면 끝이다. 카카오톡으로 보낼지, 문자로 보낼지는 AI가 결정한다. 유통 산업도 마찬가지다. “통후추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AI 업체와 새롭게 제휴를 맺은 곳에서 주문을 할 것이다. 화면을 내려가며 최저가격을 비교했던 엄지손가락과 눈은 이제 해방이 되는 셈이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이동통신사 권력을 카카오톡이, 전통미디어 권력을 네이버가, 유통회사 권력을 쿠팡이 나눠 가졌다. ‘보이지 않는 친구’ AI 등장은 또 다른 권력 재편을 예고한다. 이를 알아챈 기업들은 먼저 친구가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나는 ‘너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도 되는 걸까.

서동일 산업부 기자 dong@donga.com
#삼성#삼성전자 인공지능#ai#빅스비#bixby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