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상처를 은폐하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은폐가 때로는 상처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꽃 이야기는 좋은 예다. 아폴로 신은 원반을 던지다가 그가 좋아하는 친구 히아신스를 죽게 만든다. 그는 슬퍼하며 그 친구를 아름다운 꽃이 되어 영원히 살게 한다. 인간 히아신스는 그렇게 해서 히아신스 꽃이 된다. 신화학자들은 이 신화에 비극이 암시돼 있다고 생각한다. 가뭄이 계속되어 밭이 타들어갈 때면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를 죽여 피를 뿌리던 야만적 의식, 그 역사가 은폐되고 신과 인간에 관한 신화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아네모네나 수선화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은폐를 하지 않으면서도 은폐 효과를 달성하는 스토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심청전’은 그런 스토리 중 하나다. 이것도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를 제물로 삼은 야만적 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인당수는 풍랑이 유독 심하고 물길이 험하여 항해가 어려운 바다다. ‘바다의 용들이 싸우는 것처럼’ 폭풍우가 일고 바닷물이 빙빙 도는 곳이다. 선원들은 바다를 달래려고 배를 멈추고, 쌀밥을 짓고 소와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지낸다. 심지어 인간까지 제물로 바친다.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은 ‘몸에 흠결이 하나도 없고 효성과 정절을 갖춘 십오 세나 십육 세 먹은 처녀’여야 한다. 선원들에게는 그런 제물이 필요하고, 열다섯 살이 된 심청에게는 아버지가 눈을 뜨는 데 필요한 백미 삼백 석이 필요하다. 그렇게 심청은 팔려서 제물이 된다.
그런데 ‘심청전’은 심청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심청이 용궁에 들어가 살다가 연꽃이 되어 다시 인당수로 돌아오는 것으로 스토리의 방향을 전환한다. 젊은이의 피가 뿌려진 그리스 땅에 아름다운 히아신스가 피어나듯, 심청이 죽은 인당수에 영롱한 연꽃이 피어난다. 공교롭게도, 장사를 갔다가 막대한 이익을 내고 돌아오던 선원들이 인당수에 이르러 심청의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다가 그 꽃을 발견한다. 심청은 후에 꽃에서 나와 황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버지를 만난다. 심봉사는 물론이고 다른 맹인들까지 덩달아 눈을 뜬다.
죽은 심청이 어떻게, 살아나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죽은 히아신스가 어떻게 히아신스 꽃이 될 수 있는가. 판타지다. 그러나 제물이 된 젊은이들이 꽃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판타지면 어떤가.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기억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가능하게 되는 스토리를 통해, 치유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인간의 삶에 신화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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