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2000년)’는 1960년대 홍콩에서 배우자의 불륜 때문에 만나게 된 남녀의 엇갈린 인연을 그린다.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뜻한다. 두 주인공이 함께한 순간이 그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자막처럼 이들의 만남은 아쉬움만 남긴 채 끝이 난다.
화양연화는 홍콩의 화려했던 과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나라 안팎에서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시선이 쏟아졌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던 홍콩의 옛 모습을 그리워한 감독의 향수가 영화 속 홍콩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지난달 19일 새로 단장한 모습을 공개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는 이곳의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했다. 1967년 태어난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었다. 그 당시 보기 드물게 엘리베이터, 가스보일러 등 최첨단 시설을 갖춘 고급 아파트였다. 아래층 상가에선 TV, 오디오, 냉장고 등 각종 전자기기와 부품 등을 살 수 있었다. 도색잡지, 해적판 LP음반을 파는 곳도 있었다. 소위 잘나가던 시절의 세운상가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 1998년 광진구 강변 테크노마트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운상가를 찾지 않았다. 2006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일대(43만8560m²)를 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세운상가는 도심 속 흉물로 방치됐다. 2014년 6월 서울시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버려진 이곳에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 대신에 건물과 주변을 리모델링하는 재생사업을 벌인 것이다.
세운상가는 광장과 공중 보행교, 전망대(서울옥상), 스타트업 창작공간 등을 품고 재탄생했다. 오래된 가게들 사이로 커피숍, 디저트 가게 같은 청년 점포도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계단과 벽 사이로 새로운 활기가 자리 잡으며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잊고 있던 이름이 오랜만에 언론에서 소개되자 중년이 된 ‘세운상가 키즈’들은 이곳을 찾아 어릴 적 추억을 소환했다. 새로운 명소를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세운상가의 변신을 두고 일각에선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정작 이곳 상인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임대료 상승만 부추겨 오히려 상인들을 괴롭힌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잊혔던 이름을 다시 불러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세운상가의 부활은 중요하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는 모든 단편에 담겨 있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낡은 건물과 오래된 거리 하나하나가 모여 도시의 현재를 이룬다는 뜻이다.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국은 과거를 지우기에만 바빴다. 기억을 보존하고 손질하는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도시재생은 물리적 공간에 파묻혀 있던 기억을 깨우고 숨결을 불어넣어 그의 화양연화를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러려면 먼저 각 지역의 지나온 과거를 좀 더 세심히 더듬어봐야 한다. 소심하게 망설이는 사이에 얼마 남지 않은 아름다운 기억마저 ‘영화 속 그녀’처럼 떠나버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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