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는 비교적 일정한 형식과 체제로 계속해서 출판되는 시리즈 도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총서는 1983년 ‘한국어의 계통’(김방한)으로 출발한 대우학술총서다. 1999년까지 424권이 민음사에서 나왔고 이후 아르케, 아카넷 출판사가 차례로 맡아 현재 618권까지 나왔다. 상업성은 없지만 학술적 가치가 높은 책들이 많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등 해외 학술명저도 많다.
문학과지성사가 1981년부터 펴낸 ‘현대의 지성’ 시리즈는 피터 L 버거의 ‘이단의 시대’부터 최근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수행성의 미학’까지 165권이 나왔다. 출간 발걸음이 더디지만 알차다.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박이문의 ‘예술철학’, 한상진의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 등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저 외에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등 20세기 명저를 다수 소개했다.
1996년 A N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을 시작으로 2016년 10월에 150권을 돌파한 한길그레이트북스는 대표적인 고전·명저 총서다.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주목받는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등도 이 시리즈로 우리 독자들과 만났다.
이채로운 총서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점령하 파리에서 비밀리에 출간된 ‘심야총서(深夜叢書)’가 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40권이 나온 이 총서는 파시즘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인간 정신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제1권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은 나치 독일의 회유 정책의 기만성과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면서 레지스탕스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았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총서는 소르본대의 문화·학술 공헌에 필적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1년 9월 시인 보들레르의 작품집이 첫 권으로 나온 이후 라신, 볼테르, 에드거 앨런 포, 스탕달 등의 작품집이 연이어 나왔다. 800권 가까운 책 가운데 최고 베스트셀러는 40만 부 가까이 팔린 생텍쥐페리 작품집이다.
기획 취지를 지키면서 책의 질을 꾸준히 유지하고 오랜 세월 이어지는 총서는, 해당 출판사뿐 아니라 한 사회의 출판 수준을 가늠케 한다. 나아가 한 국가의 문화 역량에 대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20년 이상 나오면서 권수가 세 자릿수를 넘긴 우수한 총서가 몇 개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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