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장을 맡았던 김지형 전 대법관이 어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원자력발전 찬반 측 모두 수긍할 만한 답이 나온 것을 ‘운’이라고 했다. 다른 사회적 갈등도 공론화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이번 같은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김 전 대법관은 “공론조사는 대의(代議)민주주의가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보완재로서 의미가 있다”며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공론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며 공론조사 만능주의를 경계했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의 원전 건설 재개 권고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공론조사 방식을 활용하자는 주장이 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어제 국무회의에서 “국가적 갈등 과제를 소수 전문가들이 결정하고 추진하기보다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 직접 참여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평소 “국민의 집단지성과 함께하겠다”며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역설해온 문 대통령으로선 앞으로도 공론화 모델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공론조사가 집단지성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熟議)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론조사의 사회·경제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김 전 대법관의 고언(苦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원전 같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를 일반 시민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여전하다. 공론조사를 둘러싸고 진영논리에 따른 여론전쟁이나 가짜 뉴스가 판칠 경우 오히려 더 큰 갈등을 부추길 가능성이 작지 않다.
김 전 대법관의 지적대로 공론조사를 통한 사회 갈등 해결은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그만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여론을 수렴하고 국회 내 토론을 거쳐 책임 있게 일을 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에서 채택한 대의민주주의다. 정부와 국회가 정치·사회적 이슈에 답을 내지 못하고 직접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책임을 미룬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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