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이 바뀌고 아내 얼굴이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유의 말이 급훈이던 시절이 있었다. 고학력 백수가 널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실소가 나온다. 그럼 왜 공부를 해야 할까?
최근 읽은 책이 어렴풋한 실마리를 줬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출간돼 아직도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힐빌리(Hillbilly)의 노래’다. ‘힐빌리’는 미 중부의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 힐빌리인 저자 J D 밴스(33)의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다. 허구한 날 남자를 바꾸고 마약 검사 때는 아들 소변을 대신 냈다. 아버지는 친권을 포기했다. 친척 중 대학 졸업자는 없다.
밴스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사업가가 됐다. 로스쿨 동문인 아내는 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의 서기다. 하지만 단순한 ‘개천용’의 성공담만은 아니다. 가난과 계급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저소득 백인이 왜 히스패닉과 흑인보다 미래를 더 비관하며 대선에서 트럼프를 찍었는지 등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의 성공에 기여한 세 그룹이 있다. 망나니 딸을 대신해 사실상 손자를 키운 외조부모, 규칙적 생활과 절제의 미덕을 알려준 해병대 교관들,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가르쳐 준 예일대 인맥.
특히 자녀를 혹독하게 교육하는 ‘타이거 맘’ 열풍을 일으키고 ‘제국의 미래’ 등 수많은 명저를 낸 에이미 추아 예일대 교수(55)가 인상적이다. 추아 교수는 그의 학업, 연애, 진로 결정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의 인생은 글로 쓸 가치가 있다”며 출판도 독려했다. 밴스는 이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는 미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주창한 ‘사회적 자본’ 개념과 비슷하다. 현대의 중요 자본은 돈이 아니라 개인 간 협력, 신뢰, 호혜가 낳는 사회적 자본이며 이것이 사회 전체의 안전망이란 논리다. 이때 호혜는 받은 만큼 베푸는 ‘한정적 호혜(specific reciprocity)’가 아니라 사심 없이 베풀고 이것이 증폭되는 ‘포괄적 호혜(generalized reciprocity)’다.
즉, 사회적 자본은 혈연과 지연에 근거한 ‘우리가 남이가’와 다르다. 인간은 주위에 존경하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그 훌륭한 사람이 베푸는 조언과 대가 없는 선의는 엄청난 동기를 부여한다. 입신양명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밴스는 “사회적 자본은 친구, 동료, 멘토에게서 얼마나 배울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척도”라고 말한다.
책을 덮자 여러 생각이 오갔다. 놀랍도록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이 책의 저자가 불과 33세이고 그의 첫 작품이라는 것, 이런 훌륭한 콘텐츠를 알아봐 주는 독자층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명색이 글 쓰는 일을 하지만 ‘자전적 글쓰기를 할 때 이 정도로 솔직하게 내 치부를 드러낼 수 있을까’란 질문에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독자에게 여러 함의를 던져주는 좋은 책 또한 한 사회의 사회적 자본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을 ‘명문대 진학이 역시 킹왕짱’으로 오독(誤讀)하는 이는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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