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 대사는 폼 나는 자리다. 웬만한 장관보다 주목받고, 상징성도 크다. 요즘엔 북한의 도발이 심각해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 팔목을 비틀려는 때여서 비중이 더 커졌다. 강대국 틈에서 국익의 선봉에 서는 외교관의 꽃이 바로 주미 대사다.
외교부 출신인 전임 안호영 대사는 4년 4개월 임기 내내 실무형이었다. 백악관과 국무부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한반도 정책 지휘자인 매슈 포틴저 백악관 선임보좌관과 자정까지 통화하는 일도 잦았다.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미국 정부 핵심 인사들과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을 받았다.
워싱턴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안 대사 유임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미 신정부 간의 불편한 기류를 감안해 고려해볼 만한 카드라는 거였다. 실제 사드 배치와 인도적 대북 지원으로 촉발된 갈등 기류는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한미 관계가 좋다고 하지만, 트럼프 정부 관련자들은 사석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래서 신임 조윤제 주미 대사(65)에게 시선이 쏠린다. 경제학자 출신인 조 대사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경제보좌관을 지냈다. 비자금 정치권 전달 대화 녹취록인 ‘X파일 사건’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 이후 첫 민간 출신 주미 대사다. 대미 외교에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미국의 관심은 조 대사의 성향이다. 문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외교부 주류의 논리를 경계하기 위해 유엔 출신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대선캠프 출신인 조 대사로 라인업을 짰다는 걸 미국도 잘 알고 있다.
조 대사 주변 인물도 관심이다. 그의 손아래 동서는 ‘한국전쟁의 기원’(1986년)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74)다. 6·25전쟁의 원인이 ‘김일성의 남침’이라기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내전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로 386 운동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커밍스 교수는 여전히 대북 압박에 반대하며, 햇볕정책이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12월 조 대사와 커밍스가 나눈 대담을 보자. 커밍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위협이 없었다면 북한은 핵 개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만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김일성 때부터 은밀하게 핵 개발에 매달려온 북한이 피해자 연기를 할 때 즐겨 쓰는 논리다. 또 “미국은 제재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멈춰야 한다”며 “(대화 중심의) 관여(Engagement) 정책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정도면 트럼프 정부의 생각과만 다른 게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움직임과도 동떨어진 주장이다.
조 대사가 동서의 말에 이견 한마디 달지 않은 당시 영상은 지금도 온라인에 있다. 한 다리 건너라지만 조 대사가 트럼프 정부에서 거부감을 갖는 커밍스의 가족이라는 건 현재의 미국 주류에 잘못된 편견을 줄 수도 있다.
조 대사는 그간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합리적 경제학자로 평가받아 왔다. 스스로도 “학자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겸손한 모습과 탄탄한 내공으로 학계의 존경도 받았다. 31일 워싱턴 특파원단과 만났을 때도 차분하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었다.
조 대사는 “성공한 주미 대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조 대사가 강조했던 ‘정직한 메신저’ 정도의 각오로는 지금의 대미 외교 풍랑을 넘기 힘들다. 미국 주류로 녹아들어 신뢰를 얻어내야 탈출구가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주변을 유령처럼 맴돌았던 반미 정서와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야 어려울 때 더 폼 난 주미 대사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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