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검은색 피아노였다. 종종 쳤는지 먼지는 별로 없었다. 덮개를 열고 건반을 두드렸다. 익숙한 동요 가락이었다. 손놀림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맑은 소리를 냈다. 피아노 옆을 보니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Steinway & Sons)’ 마크가 있었다. 조성진 등 유명 연주자들이 지금도 애용하는 미국 명품 피아노다.
12년 전 이맘때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집에서의 한 장면이다.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한 오픈 하우스 행사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그때 이미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였다. 정치적 위세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 못지않았다. 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는 피아노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친구 같은 피아노죠. 아버지가 사주신 거예요. 청와대에 있을 때도 쳤고. 저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주변에 사람도 별로…. 외로울 때 치면 위로도 되고 그래요. 들어가서 식사하시죠.”
기자들은 처음 와 본 박 전 대통령 집에서 쭈뼛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서가 기자들을 방 안으로 밀쳤다. “대표님 민망하시겠네. 빨리 들어가세요.” 당시 경호를 책임졌던 안봉근 전 대통령국정홍보비서관이었다. 그날 집 안에 당 관계자는 안봉근뿐이었다. 행사 정리도 안봉근 몫이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그를 다시 봤다. ‘박 대표가 정말 안봉근을 신뢰하는구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논란을 접한 뒤 이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안봉근이 이재만 전 비서관과 함께 국정원 특활비를 007 가방에 담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체포돼 구속됐다. 이재만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특활비를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안봉근은 박 전 대통령에게 특활비를 어떻게 썼는지 물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이재만 진술과 별다를 게 없다. 안봉근은 1997년 박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함께했던 첫 비서다.
게이트 양상으로 전개되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차고 있다. 물론 박 전 대통령과 ‘문고리 3인방’에 대한 비판이 가장 많다. 국정 농단도 모자라 간첩 잡으라고 국민 세금으로 마련한 국정원 예산을 꿀꺽했느냐는 지적이다. 동시에 적지 않은 사람이 안봉근 이재만이 검찰에서 박 전 대통령 이름을 댄 것을 손가락질한다. 법 집행 차원에서 보면 안봉근은 검찰 수사에 협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모신 ‘주군’을 검찰에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 것을 놓고 정치, 더 나아가 사람 사는 게 도대체 뭐냐고들 한다. 국정원 특활비 사건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정치에 꽤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될 듯하다. 당연히 국정원 특활비 무단 유용이라는 적폐를 근절할 계기가 될 것이다. 동시에 정치인들은 앞으로 정치하기가 훨씬 더 퍽퍽해질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안봉근의 파국은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이젠 ‘절대 고독’을 즐기는, 성직자 수준에 가까운 자기 관리를 감내해야 정치인으로 롱런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인 2009년 3월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은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치, 하지 마라. 진담으로 하는 말이다. 거짓말, 정치자금, 사생활 검증, 이전투구의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 … 정치의 신뢰가 계속 떨어지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검찰이 국정원 특활비가 박 전 대통령에게 흘러갔는지 조사하려고 서울 삼성동 자택을 팔고 올해 초 새로 산 내곡동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검토한다고 한다. 집주인이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내곡동 집엔 아무도 없다. 그 대신 삼성동 집에 있던, 오래된 친구라던 그 낡은 피아노만 먼저 옮겨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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