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다-벗어지다’의 관계는 주어의 의지와 연관된다. 주어 스스로 행동하면 ‘벗다’이지만, 주어의 의지 없이 벌어지는 상황이면 ‘벗어지다’다. 그래서 ‘벗어지다’는 ‘벗다’의 피동이라 한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문장도 가능하다.
바람에 벗겨진 가발 때문에 난감했다.
둘은 무엇이 다를까? 기본형 ‘벗어지다’와 ‘벗겨지다’에서 차이를 발견해 보자. ‘벗어지다’는 ‘벗-어지다’인데 ‘벗겨지다’는 ‘벗-기-어지다’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기-’가 들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된다. 이 ‘-기-’는 뭘까? ‘벗기다’로 확인해 보면 이 ‘-기-’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아이가 옷을 벗다. 아이의 옷을 벗기다. → 아이가 옷을 벗게 하다.
위의 문장들은 ‘-기-’가 ‘-게 하다’의 의미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게 하다’의 의미를 문법적으로 표현하면 ‘사동’이다. 여기서 ‘사(使)’는 ‘시키다’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벗기다’에 ‘피동’의 ‘-어지다’가 붙은 것이 ‘벗겨지다’인 것이다. ‘벗다-벗어지다-벗기다-벗겨지다’의 관계는 아래 표처럼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벗어진’과 ‘벗겨진’을 실제에서 어떻게 구별하는가이다. 사전에서도 두 단어를 유의어로 보기도 한다. 다만 ‘벗겨지다’는 ‘가발이 벗어지게 한 주체’와 함께 나타난다.
바람에 벗겨진 가발 때문에 난감했다.
문장에 가발이 벗어지게 한 장본인인 ‘바람’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질 않은가. 이러한 차이는 ‘맞다 틀리다’를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어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너무 어렵다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인정하자. 더 중요한 것은 ‘벗어지다-벗겨지다’를 구분하는 어려움은 ‘벗다-벗기다’나 ‘벗다-벗어지다’를 구분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특수한 몇몇의 어려움은 더 일반적인 것의 어려움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 예는 아니니 어렵긴 해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하며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문법에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문법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벗겨지다’를 이중 피동으로 보아 틀린 말이 아닌가를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벗기다’는 사동사이기에 피동의 ‘-어지다’가 붙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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