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실험실 결과를 돈과 일자리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0일 03시 00분


허진석 산업부 차장
허진석 산업부 차장
제약사 동아ST는 올해 2월 미국의 세계적 제약기업 애브비로부터 480억 원을 받았다. 임상시험 단계에 한참 미치지 못한 ‘초기물질’을 넘기고 6350억 원이라는 거금을 받기로 지난해 말 계약한 대금이다. 이 회사가 초기물질을 찾아내 넘긴 과정은 실험실 결과가 경제적 가치로 이어진 전형적인 사례다.

이 회사가 찾아낸 바이오 물질은 ‘DA-4501’이라는 머티케이(MerTK) 억제 물질이다. 암은 똑똑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속이는데, 이때 머티케이를 활용한다. 머티케이는 자연사하는 세포를 인지해 면역체계에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데, 암 세포는 자기 주변에 이 머티케이를 깔아둠으로써 면역체계를 속이는 것이다. 암 종양 주변의 머티케이를 걷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을 활용해 암 세포를 없앨 수 있다. 특정 암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 면역체계를 활용하기에 그만큼 잠재력이 크다.

동아ST는 DA-4501의 특성을 발견한 뒤 지난해 4월 미국암학회(ACCR)에 참석했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 물질을 찾은 정도여서 현장에서 발제와 토론을 하는 간이 발표 형식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애브비 관계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ST 홍보 업무를 겸하고 있는 동아제약 관계자는 “애브비도 내부에서 머티케이 억제 물질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진척이 없다가 동아ST 연구 결과를 듣고 현장에 미리 와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8개월 뒤 기술 이전 계약으로 이어졌고, 애브비는 지금 이 물질을 갖고 신약 개발을 추진 중이다.

학술 결과 발표 현장인 학회에서 사실상의 기술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적어도 신약 개발 분야에서는 그렇다. 기술과 자본의 고도화로 신제품 개발 경쟁이 격해질수록 이런 현상은 일반화될 공산이 크다. 과학과 상품 간 거리가 짧아지는 것이다.

분자생물학 분야의 과학적 연구가 축적되면서 지금은 매출액 기준 세계 1∼10위의 제약사가 모두 바이오의약품을 만들고 있다. 단일 의약품으로 판매액 1위(143억 달러·2015년 기준)를 차지하는 것도 류머티스 관절염을 치료하는 ‘휴미라’라는 바이오의약품이다. 바이오의약품은 화학의약품보다 정교하게 병을 치료하고 부작용도 적은 편이다.

바이오신약 개발은 수조 원의 연구비는 물론이고 십수 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섣불리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대처하기 나름이다. 글로벌 제약 기업들은 개발에 따른 위험 부담을 줄이고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실험실 결과도 흡수하고 있다. 오히려 작고 유연한 기업일수록 연구개발로 성과를 올리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동차와 조선, 석유화학과 반도체 산업에 기대 돈과 일자리를 만들어 왔다. 지금은 그 분야가 바뀌는 전환기에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졸업생 창업 분야를 조사했더니 2010년대까지 바이오테크와 의약품, 에너지 분야가 꾸준히 늘고 있고 제조업과 엔지니어링은 줄고 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절대적 비중은 높지만 2000년대 들어 정체하고 있다.

대한민국 성장기에 강조되었던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별로 집중해야 하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정부의 과감하면서도 효율적인 과학·기술 투자가 중요한 이유다. 실험실 과학자가 성공하는 사회에서는 과학의 중요성을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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