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콩쥐팥쥐’는 ‘조선시대 중엽, 전라북도 전주의 서문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마을에 최만춘이라는 선비가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최만춘의 딸이 콩쥐였고, 그의 후처 배씨가 데리고 들어온 딸이 팥쥐였다. 최만춘이 후처를 들인 것은 아내인 조씨가 콩쥐를 낳고 100일 만에 세상을 떠나서였다. 과부인 배씨가 후처로 들어온 것은 콩쥐의 나이 열네 살 때였다. 스토리는 잘 알려진 대로 착하고 아름답고 효성이 지극한 콩쥐가 교활하고 악독한 계모와 못생기고 심보마저 고약한 팥쥐한테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당하지만, 나중에는 사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콩쥐팥쥐 얘기는 전주 말고 다른 곳에도 있었다. 경기도에도 있었고 경상도에도 있었다. 아프리카에도 있었고 유럽에도 있었다. 콩쥐가 신데렐라로 바뀌고 꽃신이 유리구두로 바뀌는 등 자잘한 것들이 바뀔 뿐, 형식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계모는 나쁘다는 것,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팥쥐(들)도 나쁘기는 매한가지라는 것, 결국에는 착한 콩쥐가 승리한다는 것. 이런 스토리는 조선 중엽만이 아니라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반복하여 소비된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의 화석화가 생겼다.
계모라는 말이 환기하는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콩쥐팥쥐’에 나오는 배씨처럼 무섭고 악의적인 모습이다. 계모, 즉 ‘어머니를 계승한 이’라는 애초의 좋은 의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감부터가 으스스해져 버렸다. 그리고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탐욕스럽고 시샘이 많은 팥쥐처럼 보기 싫은 모습이다. 우리 안에 들어앉은 고정된 이미지가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해버려 그렇다. 고전소설에서 콩쥐의 남편 사또가 팥쥐를 죽여, 아이들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엽기적인 방식으로 시신을 처리해 배씨에게 보내는 행동까지가 정당화되는 이유다. 그들은 사악하니까.
그러나 ‘콩쥐팥쥐’에 나오는 것과 다르게, 계모들과 팥쥐들은 사악하기는커녕 공동체의 폭력적인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은유적으로 얘기하면 ‘벌거벗은 몸’이다. 낯선 과부가 자신의 치마꼬리를 잡은 딸과 함께 동네로 들어오는 모습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스토리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사람들의 ‘부릅뜬’ 눈이, 그렇지 않아도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벌거벗은’ 소수자들을 더 ‘벌거벗은’ 타자로 만든다면, 기존의 스토리들이 읽히고 소비되는 방식을 이제는 정말이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소수자인 계모들과 팥쥐들을 향해 ‘부릅뜬’ 눈은 폭력이지 공동체의 윤리가 아니다. 그래서 ‘콩쥐팥쥐’ 이야기의 무의식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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