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하소설 대망(大望)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할복(割腹)이다. 의복을 갖춰 입고 앉은 패장(敗將)이 작은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면 옆에 선 무사(가이샤쿠진·介錯人)가 큰 칼로 목을 쳐 주는 식이다. 할복은 자살의 가장 극한 방식이다. 할복은 1867년 메이지(明治) 유신 때 법으로 금지됐지만 1976년 ‘록히드 스캔들’ 수사 때엔 후세 다케시(布施健) 일본 검찰총장이 할복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정치권의 반발을 “무죄 판결이 나오면 배를 가르겠다”는 말로 눌렀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4학년생 김상진이 할복했다. 연단에서 양심선언을 낭독하던 그는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러운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는 마지막 부분은 읽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학생들의 저항 의지에 불을 붙였고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김상진의 표현처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민주화 과정의 희생은 너무나 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였던 1월 초, 당시 새누리당에선 ‘할복’을 둘러싼 설전이 펼쳐졌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인명진 목사가 친박(친박근혜) 좌장 서청원 의원을 정조준해 “일본 같으면 할복을 한다”고 쏘아붙이자 서 의원은 “목사님, 제가 언제쯤 할복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맞받았다. “똥 싸놓고 달아난 꼴” “목사가 죽음을 강요” 등 볼썽사나운 공방이 이어지며 쇄신은 물 건너갔다.
▷친박 핵심인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16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1억 원 수수 의혹과 관련해 “사실이라면 동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다”며 반발했다. 5년 전 저축은행 사건에 휘말린 박지원 의원의 트위터 글 ‘목포역 할복’에서 역명(驛名)만 달라졌다. 박 의원은 1심 무죄, 2심 유죄, 3심 무죄였다. 1998년 3월 새벽, 북풍(北風)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문구용 칼로 복부를 수차례 그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검찰은 “자해(自害)”로 규정했다. 아무리 결백을 강조한다 해도 ‘할복’을 입에 올리는 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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