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이후백(李後白)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공론(公論)을 따르는 데 힘쓰고 청탁을 받지 않아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들락거리면 몹시 옳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벼슬자리를 얻었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는데, 이후백이 얼굴빛을 바꾸고 한 책자를 보여주며 말하였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여기 적어 두고 장차 벼슬자리에 올리려 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구하는구나. 구해서 얻는다면 공정한 방법이 아니다. 애석하구나, 그대가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0권 ‘용인(用人)’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름을 적어놓았는지 확인하자고 덤빌 수도 없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부탁한 사람도 덜 민망하게 만드는 ‘청탁 거절의 묘수’인 듯합니다. 비슷한 이야기 몇 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세조 때 한계희(韓繼禧)는 대신이 자기 자식을 위하여 관직을 구하면 “‘집안사람을 천거할 때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內擧不廢親)’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제가 현명하다면 그를 추천하는 사람도 잘못이 아니고 등용하는 사람도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지만, 만약 부귀한 집 자제라 하여 조금이라도 청탁의 흔적을 남긴다면 이는 사람을 등용하는 대체(大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조 때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이 되어 홍문관의 교리(校理), 수찬(修撰)을 뽑을 때 붓으로 자기 아들 이덕열(李德悅)의 이름을 지우면서 “내 아들이 옥당(玉堂)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선조 때 홍담(洪曇)이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대사헌 조사수(趙士秀)가 대간(臺諫)에게 “홍담은 나의 절친한 벗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문서 처리에 뛰어나지 군사를 주관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고는 임금께 아뢰어 교체할 것을 청하였다.
교체를 청한 뒤 조사수는 바로 홍담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번 일이 자네의 뜻에 어떠한가?” 그러자 홍담은 “내가 군사를 주관하는 것은 결코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남몰래 걱정이 많았다네. 다만 자네가 나라의 여론을 이끌고 있으니 자네를 믿고 근심하지 않았네”라고 하였다는군요. 참으로 빛이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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