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를 ‘대표가 시민을 배신하는 대리 정치’라며 야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착잡해진다.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신뢰의 가치가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선출된 시민의 대표들을 시민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배신당하고 상처받을 수 있는데 왜 누군가를 사랑하느냐고 힐난하는 것만큼이나 삭막한 일 같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 하든, 현대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들과 그들의 대표들이 서로를 아껴 가며 협력해 공동체를 가꿔 가고자 하는 집합적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1646년, 영국 평등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리처드 오버턴은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 신은 자연의 손을 빌려 우리 모두를 천부적 자유와 품격을 갖고 태어나게 했다. … 모든 사람은 갖고 태어난 권리와 특권을 평등하게 향유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 어느 누구도 그로부터 파견되거나 위임받거나 혹은 자유로운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를 대신할 수 없다.”
당시 수평파(Leveller)라 불렸던 이 운동은 폭력적으로 억압되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때 표명된 ‘침해될 수 없는 권리의 평등한 향유’와 ‘동의에 의한 통치’의 개념은 그 뒤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더 깊이 옹호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전해 온 여러 원리와 제도의 복합체가 대의민주주의다.
첫 번째로 가장 큰 특징은 ‘정부가 있는 민주주의’라는 점이다. 관료제도 없고 정당도 없고 법관도 없이 시민이 번갈아 통치의 역할을 감당했던 고대 직접민주주의와는,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시민들은 왜 정부를 만드는 데 동의하게 되었을까? 홉스와 로크, 루소를 포함해 17세기 중엽 이후 정치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집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째, ‘기본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다. 정부라는 공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한 대신 시민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할 권리를 갖고자 했다. 이 역시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며 실현된 권리로서, 여기에는 시민 불복종과 촛불집회 같은 저항권이 포함된다.
셋째,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다. 시민은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이익과 요구를 갖는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결사의 권리를 갖는 변화 역시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되었다.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고,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이익의 표출과 집약, 조정이 가능해야 한다는 이 다원주의의 원리를 통해, 개인 중심적 기본권이 기존의 한계를 넘어 사회적 권리로 확장될 수 있었다.
넷째, ‘입헌주의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다. 그 핵심은 기본권을 침해하는 입법은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역시 18세기 말에 비로소 구현된 원리였다. 그런 점에서 ‘사회 안녕’, ‘국가 안보’, ‘풍속을 해칠 우려’ 등을 이유로 기본권의 제한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는 지금의 헌법과 국가보안법은 대의민주주의에 반한다.
다섯째, ‘정당이 정부가 되는 민주주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시민 결사체는 정당이다. 그들은 공익의 내용을 경쟁적으로 정의한다. 시민의 참여와 지지를 경쟁적으로 조직한다. 궁극적으로 정부가 되어 공공 정책을 주도한다. 그런 정당이 정부가 되고 잘못 통치하면 교체될 수 있을 때 책임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여섯째, ‘수평적 권력 분립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다. 입법·행정·사법부 사이의 삼권분립 원리가 대표적이다. 분립된 권력 부서 사이에서 견제만이 아니라 균형도 중요한데, 그 역할은 입법부가 맡는다. 그래서 행정수반의 탄핵뿐 아니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 역시 입법부가 주도해야 한다.
일곱째, ‘야당이 있는 민주주의’다. 시민이 항의만 할 수 있을 뿐 통치권의 향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양한 정당이 대안으로 성장하고 이들 사이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져야만 민주주의는 그 이상과 가치에 맞게 발전할 수 있다.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이런 원리 위에서 작동하면서, 때로 실패하지만 다시 학습하고 개선되는 일을 반복하는,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정치체제이다. 그 원리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대표를 없애고 시민이 나서 일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 세상을 미혹할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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