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법관의 양심과 독단, 그리고 블랙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6일 03시 00분


판사 나이 사십은 不惑 아냐… 독단에 빠지기 쉬운 나이
‘한번 판사면 영원한 판사’ 안돼… 고법 부장판사 승진 없앤다면
재임용 심사라도 강화해야
영장 없이 판사 PC 연다는 건 모두가 아는 양심에 위배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얼마 전 법원 게시판에 ‘재판이 곧 정치’라고 쓴 오현석 인천지법 판사는 올해 40세다. 2011년 각각 ‘가카새끼’와 ‘가카의 빅엿’이란 말이 들어간 글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당시 이정렬 부장판사와 서기호 판사는 42세와 41세였다. 옛날에 사십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오늘날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도 사십이 불혹인지 모르겠지만 사십은 판사로서는 그저 약관(弱冠)의 나이일 뿐이다.

미국 대사관이 각국에 배포하는 ‘미국의 사법제도(Outline of the U.S. Legal System)’란 자료를 보면 미국의 주 지방법원 판사는 대략 46세에, 연방 지방법원 판사는 49세에 된다. 항소법원의 경우 주 항소법원과 연방 항소법원에 판사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는 나이는 공히 53세 정도다.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심 재판의 배석판사가 둘 다 31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법정드라마를 즐기는 미국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일본만 해도 판사가 되기 전에 판사보로 10년을 보낸다. 그 후에 임용 요청이 받아들여져야 판사가 된다. 이렇게 하고도 10년마다 재임용 절차를 밟는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한번 판사는 영원한 판사다. 10년마다 재임용 심사가 있지만 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 보니 지방법원 배석판사에서 단독판사나 고등법원 배석판사를 거쳐 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는 웬만한 판사는 다 한다. 걸러지는 유일한 절차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과정인데 이것마저 없애겠다고 한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을 없애기로 한다면 재임용 심사라도 강화해야 균형이 맞는다.

얼마 전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자신의 SNS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의 잇따른 구속적부심 석방 결정을 비판했다. 김 부장판사는 2012년 자신이 항소심 재판장을 맡았던 횡성 한우 사건의 유죄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비판해 서면경고를 받고, 2014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43세에 드러난 가벼운 처신이 45세에 징계를 받아도 변하지 않고 48세에 또 재발했다. 이런 판사를 재임용 심사로 잘라내지도 못하고, 고법 부장판사 승진에서 탈락시켜 제 발로 나가게 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에서도 40대 중후반이면 판사를 시작할 나이지만 변호사로서 ‘세상사의 검증’을 거친 40대 중후반의 판사와 법원이라는 온실에서 커 40대 중후반에 이른 판사가 같을 수 없다. ‘소년·소녀 급제’해 약 10년간 배석판사를 하고 나오면 예전에는 서울시장 안 부러웠다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단독판사가 된다. 부장판사 밑에서 숨겨졌던 배석판사들의 독단이 잘 드러나는 때가 이 시기다. 이때 걸러내지 못하면 그 독단이 부장판사 때까지 이어진다.

독단에 빠진 판사들은 양심을 판사마다의 성향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재판이 곧 정치’라는 오 판사가 그런 사례다. 그러나 양심은 어원상 함께(con) 아는 것(scientia)이다. 양심은 빈곤한 인문학적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철학적 기원을 갖고 있다. 양심은 비유하자면 1000개의 강에 비친 달(月印千江)과 같다. 각자에게 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판사라면 이 사건을 내가 보듯이 동료들도 볼까, 상급심 판사들이라면 어떻게 볼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아는 것(conscientia)’이다. ‘내가 아는 것’은 있을지언정 ‘함께 아는 것’ 따위는 없다고 여긴다면 법관을 그만두고 나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든가 해야지 법원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법원이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양심을 시험받고 있다. 법원 재조사위원회는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해 가 언제든지 열어볼 준비를 해놓고 있다. 영장을 제시받지 않고 자신이 쓰는 컴퓨터를 열어줄 의무가 없다는 것은 법관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재조사위가 이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려 한다. 독단을 양심으로 착각한 몇몇 법관들이 재조사위를 좌우하는 사태를 침묵하는 많은 법관들이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과정#재판이 곧 정치#함께 아는 것#법원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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