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환경미화원’. 쓰레기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실존을 대변하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쳐 보이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은폐의 징후마저 느껴지는 말이다. 그들은 엄동설한에도, 불볕더위에도 쓰레기와 사투를 벌인다. 그러면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기도 하고 청소차의 오작동이나 부주의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지난달만 해도 청소차 덮개에 끼여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50년 전, 미국에서도 비슷한 사고로 두 명의 흑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특별히 떠올리는 것은 미국 역사를 바꿔 놓은 인권운동가의 죽음과 관련이 있어서다. 마틴 루서 킹.
1968년 2월 11일, 테네시주 멤피스시에 고용된 두 명의 청소원이 청소차의 분쇄기 오작동으로 인해 죽었다. 낙후된 차량이 문제였다. 청소원들이 들고일어났다. 거의 모두가 흑인들이었던지라, 열악한 근무 여건과 인종차별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킹 목사는 4월 3일, 멤피스시에 위치한 메이슨 템플이라는 교회 건물에서, 미국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나는 산 정상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근무 여건 개선과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환경미화원, 아니 청소원(sanitation worker)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이었다.
그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인용하며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고 했다. 누군가가 강도를 당해 죽어가고 있다. 그와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을 도우려고 멈추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이민족인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을 도우려고 멈추지 않으면, 그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생각하고 그를 구한다. 킹 목사는 물었다. 여러분, 누가 이웃입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날인 4월 4일, 그는 총에 맞아 죽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이웃이 되라는 말은 그래서 그의 유언이 되었다.
5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사고가 한국에서 아직도 일어난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이제라도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일이다. 그들은 오늘도 안전의 사각지대에서,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는 100L짜리 종량제 봉투를 들어 올리고, 봉투를 뚫고 나오는 유리조각에 손을 베이고 있다. 그들은 때로는 목숨을 내어놓고 공동체를 섬긴다.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우리가 ‘그들의 섬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이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의 말이지만, 최근에 있었던 환경미화원의 죽음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윤리적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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