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임우선]트럼프 손녀와 방과후 영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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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 이상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그의 외손녀 아라벨라 쿠슈너다. 아라벨라는 시진핑 중국 주석을 위한 영상 속에서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중국 노래를 부르며 한시를 읊어 ‘여섯 살 외교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라벨라의 엄마 이방카 트럼프는 아라벨라가 세 살일 때부터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중국어라는 외국어 역량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교육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3주 뒤인 지난주 교육부는 내년부터 전국 초등학교의 방과 후 수업에서 1, 2학년 대상의 영어수업을 금지하기로 확정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보도하면서 문득 트럼프의 손녀가 떠올랐다.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도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갖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데 우리나라는 교육을 담당하는 부처라는 곳이 법으로 영어조차 못 배우게 막다니.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선행학습금지법)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만 배울 수 있고 그 전에 학교에서 가르치면 법 위반이다. 교육부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시기를 초3부터로 규정한 것은 그전에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와 혼동할 수 있고 학습 효율이 높지 않으며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국어 교육의 적기를 놓고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어쨌든 교육부 의견은 이렇다. 시험이나 진도 압박 없이, 대부분 놀이식으로 진행됐던 초 1, 2 방과 후 영어조차 강제 금지된 이유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번 금지 결정을 밝히며 “영어는 초3부터 배워도 충분하다는 학부모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방카가 한국 학부모였으면 교육부로부터 엄중한 꾸짖음을 들었을 판이다. 하지만 실제 대다수의 한국 학부모는 교육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녀가 영어를 학습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읽고 쓰기에 앞서 듣고 말하는 ‘역량’을 익히길 원하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는 일생 고통스럽게 영어를 공부해 미국 대학생도 못 푸는 대입 문제를 풀었건만, 막상 외국에 나가서는 자신 있게 밥 한 끼 주문하지 못하는 한국의 영어 교육을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없애도 교육을 통해 아이의 외국어 역량을 키워주려는 학부모의 의지가 꺾일 리 없는 이유다.

교육부는 ‘역량 중심 교육’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외국어를 학습의 관점에서 보고 정책의 최종 목표를 사교육 잡기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초 1, 2는 영어를 배우면 안 된다’는 교육독재 같은 발상이 나오지 않았겠나. 더 우스운 건 현재 유치원 및 어린이집 대부분에서는 매주 한두 시간씩 초등학교의 방과 후 수업과 유사한 영어 특별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5∼7세에는 됐던 게 8, 9세에는 갑자기 ‘위법’이라니 교육 앞에 늘 백년지대계를 말하는 나라에서 생긴 일인지 의문이다.

정책 결정 전 교육부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70% 이상의 학부모는 영어 방과 후 수업이 계속되길 희망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의견은 완전히 무시됐다. 이젠 매달 수십만 원의 학원비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집 아이들만 영어 교육의 기회를 갖게 됐다. 학부모들은 ‘학원에 안 보내도 되게 제발 학교에서 역량을 키워 달라’고 호소하며 청와대 청원을 시작했다. 6일 현재 초등 1, 2학년 방과 후 영어 지속을 요구하는 글은 청원 목록 가운데 20번째로 많은 1만5632명의 청원을 받았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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