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37>‘국가의 책임’이라고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9일 03시 00분


김용석 철학자
김용석 철학자
공인과 책임은 거의 동의어입니다. 공직을 맡는 순간 ‘도맡아 해야 할 임무’ 곧 책임이 생기고, 자신이 ‘책임의 소재(所在)’가 되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공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의 원리’를 쓴 한스 요나스는 “책임이 있는 자만이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다”라는 당연한 말을 강조했습니다. 책임의 문제에는 책임의 소재가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책임을 묻고 무책임한 결과에 대해 합당한 제재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정치사를 살펴보면 공직자와 위정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책임의 소재를 은폐하는 다양한 ‘전략’을 써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책임의 소재를 ‘모두’에게 둠으로써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큰 사건이 터졌을 때 공직자들이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고 공식 사과하는 경우인데, 이는 ‘책임 알리바이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범죄 혐의자들이 각자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모두 범죄 현장에 있었다고 ‘알리바이 없음’을 주장한다면 범인을 가려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범인을 가려내야 하는 상황에서 모두 범인임을 자처하면 범인은 철저히 은폐되지요.

스스로 나서서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구체적으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을 의도합니다. 공적인 책임의 소재는 단수로 표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 그 어느 누구의 책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단수의 책임들이 모여서 복수의 책임이 될 수 있지만, 애초부터 우리의 책임이라는 말은 그럴듯할 뿐 결국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책임의 소재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필요한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어떤 일을 누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언명해야 합니다. 이때 언어의 선택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정자가 어떤 사건의 발생과 만족스럽지 못한 대처는 결국 ‘국가의 책임’이라고 한다면 책임의 소재는 불분명해지고 자칫 모두의 책임이 됩니다. ‘결국’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책임의 소재를 불분명하게 합니다.

통치자가 ‘국가의 무한책임’이라는 말을 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뭔가 잘해보려는 의지와 다짐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국가와 정부를 혼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은 묘한 것입니다. 더구나 국가 같은 거대담론의 개념어들은 큰 영향력을 갖습니다. 책임의 소재를 논할 때는 더욱이 책임질 수 있는 말로 해야 합니다.

국가라는 말은 총체적이고 매우 추상적인 개념어입니다. 국가는 종종 신기루 같기도 합니다. 국가는 집단적 상상과 믿음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통치자들은 나라 사람들의 구체적 요구들을 국가의 추상적 개념으로 환원하면서 국민 위안의 ‘신기루 효과’로 권력을 유지하려고도 했습니다. 현대 정치사상은 ‘국가의 추상성’을 경계합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표시해야 할 것을 국가의 개념으로 환원할 때, 공적 책임의 소재는 신기루처럼 부유하게 됩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의 추상성을 구체적 정책 실천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정치이고 위정자가 할 일입니다. 이 성실한 작업의 과정에서 다양한 책임(responsibility)의 소재들도 분명해질 수 있으며, 나라 사람들의 요구에 위정자가 답하는(respond) 공적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습니다.

김용석 철학자
#공인#책임#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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