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자 여러 사람이 공동연구 끝에 최신형 수술로봇을 개발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자신의 공이 더 크다며 입씨름을 벌였다. 먼저 소재과학자가 옆자리의 기계공학자에게 “네가 한 일이라곤 내가 다 만들어 놓은 소재를 깎아서 조립해 놓은 것뿐 아니냐”고 공격했다. 기계공학자도 질세라 “내가 없었다면 네 연구 성과는 그냥 금속 덩어리일 뿐”이라고 받아쳤다. 그러자 에너지 기술자가 나서 “어허, 내가 로봇에 꼭 맞는 전력 시스템을 만들어 주질 않았다면 어쨌을 것 같나”라면서 점잔을 뺐다. 이때 뒤에서 잠자코 있던 의학박사가 끼어들었다. 그는 “우리가 환자를 수술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로봇도 아무 쓸모가 없지.” 위 이야기는 물론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요즘 대세인 4차 산업혁명과 관련 깊은 과학기술 분야의 연관성을 과학기술자들의 대화 형식으로 적어 본 것이다. 사실 이공계 전문가들이 모이는 곳에선 이것과 비슷한 실랑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다들 자긍심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과학의 혁신은 다른 분야의 도움 없인 성과를 이뤄내기 어렵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중요한 것은 ‘다 잘하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과학기술의 수준과 국내 산업 현실에 비추어 보면 약점을 보완해야 할 분야는 의외로 명백하게 보인다.
첫 번째로 꼽을 것은 소재과학 분야다. 소재 연구자들은 “첨단 산업은 우리가 이끌어 나간다”는 자부심을 보이는 일이 많다. 물론 ‘공학기술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소재도 빛을 보지 못한다’는 지적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응용과학 분야에선 세계적 수준인 데 비해 소재과학은 그렇지 못하다.
소재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에너지 관리 기술이다. 산업 혁신이 오면서 휴대용 전자기기의 사용도 점점 늘고 있다. 어디서나 전기를 만들고 충전하는 기술, 짧은 시간 충전해 아주 오랜 시간 사용 가능한 배터리 기술 등을 혁신하려면 물리, 화학 분야 기초과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며 더 크게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무인항공기, 로봇 등에 필수적인 첨단 금속 소재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탈케이스 시장만 2016년 23조 원에 달하고 2020년에는 6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소재 기술이 없다면 다른 모든 기술력이 뛰어나도 시장에 종속적으로 얽매인다. 3D프린터가 단적인 사례다. 국내에서도 3D프린터 제작 기술은 있지만 물건을 찍어낼 때 쓰는 재료(금속분말 등)는 거의 전량을 수입하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응용기술이 다소 뒤처지더라도 소재과학과 기반기술부터 철저히 연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혹시 생각지 못했던 새 사업모델이 나와도 그 즉시 따라잡고 수년 내에 1위 자리를 갈아 치운다. 반대로 한국은 기본보다 응용기술을 부지런히 연구하며 이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의 강점인 산업 응용기술은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점차 위협받고 있는 반면, 단점인 소재화학 분야는 점점 더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 국책 연구기관 과학자는 “선진국 수준으로 소재화학 연구 지원을 늘리고, 이 성과를 기업에 이전하는 형태로 국제시장에서 승부해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는 우리도 부족한 기본을 철저히 다져야 할 시기다. 기본이 튼튼한 사람이 응용에도 더 강하다는 고금의 진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더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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