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삼 전문기자의 맨 투 맨]애증의 국정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3일 03시 00분


개혁 칼날 앞에 선 국가정보원. 동아일보DB
개혁 칼날 앞에 선 국가정보원. 동아일보DB
이형삼 전문기자
이형삼 전문기자
A 씨는 북한군 부소대장으로 휴전선을 지키던 1970년대 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정부가 주선해준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학사·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초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 채용돼 안정된 직업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공부도 계속해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남북한 체제를 두루 겪은 북한학자로 이름을 알리며 탈북자 사회의 성공모델로 꼽혔다.

이명박 정부 초기, 그가 느닷없이 국정원 감찰실로 소환되면서 운명이 뒤틀렸다. 그 무렵 한 시사지에 국정원 수뇌부의 조직 장악력 논란을 분석한 기사가 실렸다. 국정원장과 기획조정실장 간의 알력, 여권의 국정원 개편 구상 등 휘발성 높은 소재를 다뤘다. 보도 직후 국정원은 취재원 색출을 위해 직원들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뒤졌고, 취재기자와 인연이 닿는 직원들을 모두 불러 조사했다. 그중에 A 씨도 끼여 있었다.

국정원은 감찰 끝에 A 씨를 해임했다. 기자 접촉 및 대화, 허가 없이 외부 칼럼 게재, 대학 무단 출강 등이 징계 사유였다. A 씨에 따르면, 기자와 접촉한 사실 외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조용히 나가 달라”는 국정원의 요구에 불응한 뒤 추가된 사유다. 중징계를 위한 명분 쌓기였으나 어느 것도 해임까지 갈 사안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대북전략실 소속이었지만 학계, 언론계 등에 발이 넓어 다른 직원이 하기 어려운 외부인사 접촉도 주 업무였다. 학자로서 언론매체에 국정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자주 실었고 그 과정에서 기자들을 많이 만났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도 만났지만 이미 언론에 나온 얘기를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고, 내가 국정원 수뇌부의 내밀한 사정을 알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대학 출강도 권장되던 관행이었다. 국정원이 민감한 기사의 파장을 줄이려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원장파’도 ‘기조실장파’도 아닌 내가 타깃이 됐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탈북자를 만만하게 본 거다.”

봉급이 끊긴 데다 국정원 근속연수가 20년에 조금 못 미쳐 공무원연금도 못 받게 됐다. 부정기적인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퇴사 후 지금껏 백화점에 뭘 사러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부 산하 통일 관련 기관장에 몇 차례 지원했으나 번번이 막판에 국정원 해임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20년 가까이 새벽 5시에 출근하면서 조직에 충성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런 A 씨가 최근의 국정원 사태를 지켜보는 눈길에는 애증(愛憎)이 함께한다. 전직 원장들이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며 국정원이 ‘적폐 청산’의 칼날 앞에 선 데 대해선 “올 것이 왔다”고 본다. 국정원의 변화와 개혁은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국정원 격인 국가보위성을 국정원에 빗댔다. 공교롭게 국가보위성도 요즘 수난을 겪고 있다. 보위성이 주민들을 강압하고 당 간부를 고문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다가 김정은의 ‘개인교사’였던 김원홍 보위상이 숙청되고 몇몇 간부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홍의 전임 보위상들도 비슷한 이유로 험한 말로를 맞았다. A 씨는 “남북한 정보기관들이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최고지도자의 비위와 부정을 방조하며 과잉 충성하다가 역풍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남과 북의 정보기관 적폐 청산 방법론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보위성은 상층부만 쳐냈다. 근간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남 공작, 첩보 스파이전(戰), 사이버테러, 사이버 선전·선동 등 북한 정보기관들의 활동 영역은 오히려 방만하다 싶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국정원 개혁이 자칫 급속한 다운사이징으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부작용을 낳은 시스템은 손보더라도 조직을 무너뜨리고 조직원들의 자존심에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내가 근무할 때나 지금이나 국정원 일각엔 제 식구 때려잡는 걸 훈장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국정원이 축적한 역량은 소중한 자산이다. 북한, 중국발(發) 정보전쟁 쓰나미에 맞설 방파제를 견고하게 증축해야 할 시점에 그나마 쌓아놓은 것마저 헐어내선 안 된다.”

보위성 말고도 통일전선부, 정찰총국, 노동당 225국 등 북한의 베테랑 정보기관들이 물밑 총력전을 펴고 있다. 이들이 운영하는 대남 매체만도 80여 개에 이른다. 북한 권부는 어느 한 정보기관이 비대해진다 싶으면 한동안 적당히 흔들어 힘을 빼는 식으로 다른 기관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한다. 철퇴를 맞은 보위성이 절치부심해 옛 위세를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 ‘동네북’ 국정원은 합법과 편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계속하며 이들의 파상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
#국가정보원#국정원 사태#적폐 청산#국가보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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