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맛집의 새 성공공식… ‘사진이 잘 받아야 뜬다’
자기홍보 익숙한 정치인들 이미지연출에 과도한 집착
연말연시는 나눔의 시즌
사회적 약자 들러리 세우는 해묵은 적폐부터 청산하길
놀라운 광경이다. 스파이더맨처럼 건물 벽에 유유히 서있는 아이, 창틀에 아슬아슬 매달린 할머니…. 실은, 눈속임이다. 예술의 이름으로 설정된 현혹의 과정. 최근 일본 도쿄에서 개막된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seeing and believing’전에서 만난 ‘빌딩’이란 작품이다. 보는 대로 믿는 인간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려는 듯 이 작가는 가공의 현실을 구축(構築)한다. 수직 아닌 수평으로 눕혀 놓은 건물부터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그 위에 관객이 앉고 누워 포즈를 취하면 건물 위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거울 속에 영화 장면 같은 만화경이 펼쳐진다.
트릭으로 기막힌 착시효과를 내는 이 설치작품은 현실을 ‘구축’하는 토대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 3년 전 서울에서 선보였던 ‘항구’도 재등장했다. 찰랑찰랑 밤바다에 떠있는 배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 배 밑은 텅 빈 공간. 반전의 재미와 더불어 ‘보이는 대로 다 믿지 말라’는 일깨움으로 관객은 인식의 덧없음을 생각한다.
전시장 곳곳에서 ‘인스타바에(インスタ映え)’라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 어리둥절했는데, 일본에서 올해의 유행어로 ‘인스타바에’가 선정됐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사진발’과 비슷하지 싶은데 사진 공유 소셜미디어인 인스타그램 등에서 큰 호응을 얻게 최적화된 것을 뜻한다. 바야흐로 이미지 연출과 현혹의 시대인가.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사전은 2016년을 대표하는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꼽았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성적 호소가 여론에 더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다. 브렉시트 대혼란의 탄생 배경이었다. 인스타바에와 탈진실, 우리의 현실에도 해당하는 말이지 싶다.
이미지에 열광하는 트렌드에서 한국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먹기 전에 인증샷부터 찍는다. 카페든 맛집이든 입소문이 나려면 그럴싸한 사진이 나오게 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실제로 어떤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먼저다. 음식이 식어가도 얼굴 모르는 남들에게 보여주려 촬영하는 것은 개인의 취미활동이므로 탓할 게 없다. 다만 ‘카톡망명’이란 말이 나돌 만큼 개인정보 유출에 예민 반응을 보이면서 먹고 마시는 사적 일상을 스스럼없이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개의치 않으니 신기하다. 유출은 싫지만 노출은 즐기는 세태인가.
이미지 연출 분야에서 단연 그 원조는 공적 영역이 아닐까 싶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에 권력층이 몰려간다. 차원 다른 ‘인스타바에’를 노린 행차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속내는 자기 홍보용 사진 촬영. 대중에게 주목받을 계기만 생기면 정치인은 언제 어디든 나타나 사진과 눈도장 찍기에 여념 없다. 물론 이런 존재의 증명은 되레 ‘민폐’가 되기 십상이고.
연말연시는 그런 사진 촬영의 대목이다. 이제 그 시즌이 연례행사처럼 개막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이른바 소외계층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 찾아가 영상기록으로 남기는 행사가 이맘때면 단골로 등장한다. 선행을 트집 잡는 게 아니고, 최소한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다른 공개 이벤트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높으신 분들이 약자를 들러리 세우고 카메라를 동원하는 것을 볼 때마다 고약한 기분이 든다.
팝아트의 황제인 앤디 워홀은 자기 PR에도 황제였다. 세속적 욕망을 감춘 적 없는 워홀은 스캔들 메이커의 이미지로 세계적 스타와 상류층 인사들과 어울렸고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가 아무도 몰래 빈민 돕기 자원봉사와 기부를 했다는 사실은 사후에 알려졌다. 탁월한 예술 장사꾼이자 자기 홍보의 귀재라는 비난을 들었던 이 사람도 자신을 위해 약자를 이용하는 퍼포먼스는 벌이지 않았다.
예술의 이름으로 현혹당하듯 대중은 또 정치라는 이름의 속임수에 현혹당하곤 한다. 예술은 그나마 즐거움이나 깨우침이라도 남기지만 정치는 무엇을 남기는가. 사정기관을 총동원해도 뿌리 뽑기 힘들 적폐가 있다면 생색내기용 연출 사진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자기 노출증과 자아도취적 자랑이 일상화된 시대라 해도 적어도 공인은 격을 지켜야 한다. 선의를 살리려면 ‘우리 이웃’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일은 삼가야 한다. 마침 청와대에 이벤트 연출의 고수가 있다니 올해는 이런 신선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연말연시 대통령 부부는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들러리로 동원하는 사진은 찍지도 공개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적폐 청산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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