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국방송공사(KBS)를 두 번이나 감사했다. 한 번은 6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감사인원 23명이 기관운영 감사를 했고, 이어 10월 17일부터 보름동안 7명이 KBS 이사의 업무추진비를 감사했다. 당초 KBS 이사 법인카드는 감사대상이 아니었지만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 KBS본부(제2노조)가 요청하자 뒤늦게 받아들였다. 두 번째 감사를 놓고 감사원 내에서 서로 손사래를 치자 “처음부터 감사를 제대로 못한 탓 아니냐”는 공직감찰본부의 지적을 받은 행정안전감사국이 다시 떠맡게 됐다.
의심은 있지만 증거는 없다
KBS 이사들이 사적 용도로 법인카드를 썼다고 감사원이 적발한 것은 657건, 1175만 원이다. KBS 이사진 11명의 2년(2015년 9월∼2017년 8월) 법인카드 사용액 2억7765만 원의 4.2%다. 이게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지 사적 사용 ‘의심’ 항목으로 656건, 7419만 원이 감사보고서에 별도 표시돼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심은 들지만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돈이다.
이런 경우 감사원은 발품을 팔아서라도 증거를 찾아 비리 여부를 철저히 따져야 한다. 하지만 이게 시간이 많이 들고 입증도 쉽지 않아 통상적 감사에선 업무추진비를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감사원은 증거를 못 잡자 KBS 이사들이 직무 관련성을 소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당집행으로 처리했다. 검찰이 범죄 용의자를 붙잡아놓고 충분한 증거 없이 ‘범죄가 의심스럽다’며 구속영장을 치는 격이다. 그렇다고 감사원은 이들을 검찰에 고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방송통신위원회에 비위 경중을 고려해 해임 건의 또는 연임 추천 배제를 요구했다. 감사원이 경중을 따져 문책할 일을 방통위 재량에 떠넘긴 것도 무책임하다.
11명 이사 중 방통위가 콕 집어 해임 절차를 밟고 있는 강규형 이사(명지대 교수)의 경우 사적 용도로 쓴 업무추진비가 327만 원이라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동호인 회식비 87만 원, 카페 음료비 49만 원, 해외여행 때 식사·음료비 16만 원, 김밥 등 식사비 94만 원, 배달음식 주문비용 76만 원이다. 강 이사는 동호인 모임에서 KBS 프로그램 발전방안을 논의했고, 카페에선 사람을 만나 KBS 관련 대화를 나눴으며, 5000∼6000원의 커피 값은 혼자 신문을 읽거나 만난 사람과 각자 부담했다고 소명했다. 해외여행 때 식사·음료비는 일본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논란이 있어 이사의 자문 대상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동호인들에게 자신이 KBS 이사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카페 이용은 취미생활의 일환이며, 만난 상대방을 적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인 여행은 공무로 보기 어렵다며 그의 주장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실은 카드를 긁은 강 이사만 알고 있을 것이다.
감사위원들도 민망했나
국민들이 낸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의 이사가 업무추진비를 한 푼이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수긍하지 않는 327만 원 법인카드 ‘부당 집행’이 KBS 이사직 수행의 중대한 결격사유인지는 의문이다. 감사원의 한 간부는 “그동안 공공기관의 업무추진비 부당 사용을 적발해도 감사위원회 통과가 쉽지 않아 상정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왕정홍 사무총장이 감사위원회에 올려 황찬현 당시 감사원장을 비롯한 감사위원들이 승인했다. 감사원은 1차 감사 때와 달리 보도자료 한 장 내지 않고 홈페이지에 감사보고서만 슬그머니 올려놨다. 강 이사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여당 몫 KBS 이사로 채워 정부가 KBS를 쥐락펴락하려는 데 감사원이 자락을 깔아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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