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떠남이며 사망이고 부정성이다. 이 부정성이 도착하는 곳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떤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즉,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하는 문제로 설정된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죽음이란 되돌아오지 않는 떠남, 주어진 자료 없는 질문, 순수한 물음표인 셈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일 년이 가까워온다. 그 후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혈육의 죽음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경험해도 죽음 앞에 선 그 시간들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랜 질병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지만, 갑작스러운 사고인 경우는 그 부재의 실감이 한참 뒤에야 찾아오기도 한다. 죽은 자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그 흔적을 드러낸다. 고인의 모습, 냄새, 소리, 감촉 들이 불현듯 되살아나곤 할 때, 죽음은 다시 현재적 사건이 된다.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도입부에서 레비나스는 묻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답한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이 멈추는 것이다. 표현적 운동들이 멈추고 또 그 표현적 운동들에 둘러싸여 숨겨졌던 생리적 운동들이나 생리적 과정들이 멈추는 것이다. 그 행동은 자신을 드러내는 ‘어떤 것’을 이룬다”라고. 또한 “죽음은 회복할 수 없는 간격”이며 “분해”이며 “응답/반응-없음”이라고.
문제는 그 완벽한 정지 상태에 이르기까지 통과해야만 하는 고통들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죽음(death)’ 자체보다 ‘죽어감(dying)’이 더 두렵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도 질병과 죽음 앞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후두암으로 죽어간 프로이트는 병이 깊어지면서 나는 악취 때문에 누구도 옆에 오길 꺼렸다고 한다. 오직 그의 딸 안나만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폈다. 이처럼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것은 죽어가는 자의 고독과 비참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생전에 쓰시던 틀니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빛바랜 틀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화학물질로 된 치아들 사이로는 침도 음식물도 더 이상 드나들지 않는다. 그 주인이 영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은 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 숨은 것이다 / 잦아들던 숨소리와 함께
숨은 숨이다
숨은 얼마나 깊이 숨어버린 것인지, 숨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탄식한다. “숨은 신보다 더 아득한 숨이여”라고. 오래도록 ‘순수한 물음표’처럼 놓여 있는 아버지의 틀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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