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환관 권력’에 엮여버린 운명공동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7일 22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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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동북아, 세계평화 위해 韓中은 협력해야 할 운명 동반자”
시진핑과의 정상회담 비롯해 문재인 대통령 네 차례나 언급
사드 3不합의 등 정책 주무른 ‘자주파’·운동권 출신 비서진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셈인가

김순덕 논설주간
김순덕 논설주간
불과 4일 만에 우리는 중국과 운명공동체가 돼버렸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속에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건 카프카의 소설에서나 가능했지만 이건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중 첫날인 13일 한중 비즈니스포럼에서 “양국은 함께 번영해야 할 운명공동체”라고 말한 것까지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을 봉합하고 상생경제로 가자는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양국은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할 운명적 동반자”라고 말한 것도 모자라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리커창 국무원 총리와의 회담에서 운명공동체라고 또 언급한 사실은 불안하고 불길하다.

‘운명적’이라는 표현은 국가 간 외교는 물론이고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도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더구나 중국은 북한의 동맹이고 시진핑은 한국을 ‘우호적이고 가까운 이웃 협력자’로 칭했다. 대선 전부터 “한반도 운명이 다른 나라 손에 결정되는 일은 용인할 수 없다”며 운전자론을 주장하던 문 대통령이 중국에 나라의 운명을 바치는 패전국 수장이라도 된 형국이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문 대통령은 11월 시진핑을 만났을 때 “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제시한 인류 운명공동체 건설을 지지한다”고 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려 했을 순 있다. 중국 주도의 운명공동체(community of common destiny)의 동반자가 되겠다는 발언도 가볍게 할 말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 대신 중국이 새로 짜겠다는, 혹은 과거에 주도했다는 천하 위계질서로 들어가 조공국(朝貢國)이 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혼밥’을 먹었다는 국빈 홀대론 저리 가라는 외교 참사다.

문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중국과의 운명공동체를 말했다면 위험하다. 모르고 써준 대로 읽었다면 더 위험하다. 대통령의 연내 방중을 위해 물밑 작업을 벌였다는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과 국민을 속이고 더 큰 목적을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이 사드의 단계적 처리에 의견을 같이했고 이를 바탕으로 문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됐다”고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밝혔다. 10월 31일 양국 정부가 발표한 사드 합의문 덕분에 방중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핵무장을 완성한 북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판에 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참여, 한미일 군사협력을 않겠다는 3불(不), 즉 사실상 안보주권을 포기한 대가로 한중 정상회담을 했다는 뜻인가.

“최근 한중 양국은 남관표 대한민국 국가안보실 제2차장과 쿵쉬안유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장조리 간 협의를 비롯해…”로 시작되는 10·31 발표문에 등장하는 남 차장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외교통상부에서 대미(對美) 자주 외교노선을 강조한 이른바 ‘자주파’였다. '한미동맹파'가 당시 청와대 386 참모들의 대미외교 정책을 반미적이라고 비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은 해임됐다. 그때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의 조사를 받았던 외교통상부 조약국 소속의 남관표가 오늘날 문재인 청와대의 참모가 돼 마침내 자주파의 꿈을 이룬 꼴이다.

남 차장을 비롯한 자주파와 1980년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외치던 주사파 출신 86그룹이 상당수 지금 청와대에 포진해 있다. “한미동맹이 깨진다 하더라도 전쟁은 안 된다”는 자주파의 거두 문정인은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다. 양국 정상이 14일 합의한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한 4대 원칙의 첫 번째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만 보면 문 특보가 외교상왕(上王)이 아닌가 싶다.

9월 국회에서 문 특보에 대해 “개탄스럽다”고 했던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공개 경고’를 받고 바로 사과를 했다. 임 실장은 김상곤 사회부총리를 비롯한 중앙부처에 ‘적폐청산을 위한 부처별 태스크포스 구성 현황 및 운영계획’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법적 근거도 없이 내려보내는 등 사실상 내각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상태다.

현재의 정부 여당은 전임 ‘제왕적 대통령’과 비서실의 월권을 ‘문고리 권력’의 국정 농단이라며 환관 정치를 비판했던 사람들이다. 대통령 보좌를 넘어선 국정운영도 모자라 그 흔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대한민국을 중국의 운명공동체로 엮어버린 환관들의 ‘외교 농단’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
#문재인대통령#한중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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