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날씨처럼 회사 분위기는 안온했다. 정원수로 심은 나무에 달린 탱글탱글한 오렌지. 하마터면 손님 처지를 잊고 선악과를 딴 이브처럼 관목 울타리를 뛰어넘어 손을 뻗을 뻔했다. 직원들은 아이처럼 미소가 환했고, 본관 건물을 떠받치는 백설 공주의 일곱 난쟁이 모양 기둥은 절로 미소가 나오게 했다. 회사 역사를 담은 박물관에서는 창업주가 만든 미키마우스의 탄생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몇 해 전 찾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부 버뱅크의 영화사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였다.
반면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남서쪽으로 불과 수 km 떨어진 한 스튜디오는 다른 풍경이었다. 무미건조한 사각형 건물이 줄지어 선 스튜디오는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제조업 공장 같았다. 하지만 디즈니 스튜디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있었다. 직원들의 날 선 눈빛에서는 치열함이 느껴졌다. 디즈니 스튜디오가 아이들의 놀이터라면, 이곳은 어른들의 일터 같았다. 20세기폭스 스튜디오였다.
극과 극의 회사 분위기처럼 이들이 생산한 콘텐츠도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미키마우스, 백설공주 같은 어린이 애니메이션으로 출발한 디즈니는 ‘순한’ 콘텐츠가 강점이다. 영화 ‘겨울왕국’처럼 가족이 즐기는 콘텐츠를 지향한다. ‘19금’ 콘텐츠가 없다.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영화가 많아 교육용으로 적당하다. 디즈니 관계자는 “계열사의 모든 영화에는 흡연, 약물 복용, 음주 장면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암묵적 가이드라인이 있다”고 했다. 포브스는 2013년 세계적 흥행을 거둔 ‘겨울왕국’이 다양한 수익원을 통해 2016년까지 무려 1070억 달러(약 115조6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이에 반해 폭스는 ‘센’ 콘텐츠에 강점이 있다. 19금 영화 ‘데드풀’ ‘킹스맨’ 등이 이 영화사 작품이다. 국내서 청불 등급을 받은 제작비 1억3000만 달러(약 1400억 원)짜리 블록버스터 ‘프로메테우스’에는 화염방사기로 동료를 태워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디즈니가 폭스를 524억 달러(약 56조6000억 원)에 인수했다. 디즈니는 결이 다른 콘텐츠의 ‘이종 교배’를 통해 사업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폭스에는 ‘아바타’ ‘엑스맨’ 같은 알짜 콘텐츠가 여럿 있다. 히어로물 팬들은 벌써부터 디즈니의 ‘어벤져스’ 시리즈에 폭스가 만든 ‘엑스맨’의 울버린이 등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근래 몇 년 새 디즈니의 공격적 경영은 업계를 놀라게 했다. 디즈니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을 성공시킨 1980, 90년대 애니메이션의 강자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토이 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를 만든 신흥 강자 픽사에 밀려 고전하자 2006년 픽사를 사들였다. 이어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 루커스필름, 만화 제작사 마블코믹스를 인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마블은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 고스트 라이더 등 슈퍼히어로 캐릭터 1000여 개를 보유한 회사. 마블의 인수를 두고 업계는 “디즈니가 마르지 않는 콘텐츠의 샘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이후 디즈니는 ‘어벤져스’ 시리즈 등을 크게 히트시키며 세계 영화 업계 1위로 올라섰다. 미국 6대 메이저 스튜디오 중 유일하게 비(非)유대인이 설립한 디즈니가 유대인 밥 아이거 회장이 2005년 최고경영자(CEO)를 맡으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폭스까지 인수한 디즈니와 디즈니의 급속한 성장 이전 업계의 절대 강자였던 워너브러더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디즈니가 히어로물로 크게 재미를 보자 워너브러더스는 최근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을 엮은 ‘저스티스 리그’를 선보이며 맞불을 놓고 있다.
디즈니와 워너의 대표 선수들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디즈니는 폭스를 인수하며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캐머런을 품었다. 캐머런은 현존 최고 흥행 감독이다. 워너는 신흥 강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협업하고 있다.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같은 독특하면서도 대중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놀런이 ‘타이타닉’ ‘터미네이터’를 만든 캐머런의 아성을 허물지 지켜볼 일이다.
디즈니는 폭스 인수로 콘텐츠뿐 아니라 플랫폼 경쟁에서도 성과를 얻었다. 디즈니는 그동안 폭스와 각각 30%씩 보유하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분야 업계 3위 훌루의 지분을 절반 이상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를 꽉 채운 디즈니는 훌루까지 보유하며 스트리밍 서비스 업계 1위 넷플릭스와 한판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디즈니발 미디어 빅뱅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덩치를 너무 키운 디즈니가 이전 같은 창의성을 유지할지 지켜볼 일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행정부가 이번 인수합병을 미디어 독과점을 크게 강화하는 조치라며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콘텐츠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다. 생쥐(미키마우스의 디즈니)가 치즈덩어리(미디어산업)를 몽땅 먹어치울지 지켜볼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