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마지막 해외순방 중이던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헬기 안에 있었다. 사막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왕세제였다. 몇 시간 후 한국이 수주한 UAE 바라카 원전 1, 2호기 본공사 착공식에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조금 후에 볼 텐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MB)
“착공식 가기 전에 한국에서 온 기자들과 점심을 하신다고요?”(왕세제)
“지금 오찬장으로 이동 중입니다. 마치고 곧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MB)
“진작에 말씀하시지…. 우리 UAE 왕실 전용 양고기 몇 마리를 보내 드릴 테니 꼭 그걸로 드세요.”(왕세제)
오찬장엔 실제로 UAE 왕실 양고기가 테이블별로 준비됐다. 순방을 동행 취재했던 기자도 몇 점 먹어 봤다. 겉은 황금색으로 익혔는데 누린내는 없고 식감은 부드러운 닭고기 같았다.
MB가 처음부터 왕세제에게 왕실 양고기를 대접받고 원전 사업을 따낸 것은 아니었다.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MB는 중동을 잘 알았다. 하지만 왕세제는 대통령 되기 전 서울시장 때 처음 알았다. 주변을 수소문한 MB는 왕세제가 청년 시절 시인 지망생이었던 것을 알아냈다. 그가 쓴 아랍어 시를 찾아내서 한글과 영어로 번역토록 해 협상할 때 ‘깜짝 카드’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대 눈 안에 머물고 싶으니 눈물을 흘리지 마오./그러면 내가 머물 수 없으니…’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시였다.
MB는 당시 아부다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MB는 바라카 원전 사업에 대해 “(박근혜, 문재인 등 주요) 대선후보들이 (원전 건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공약을 해서 (한국과 경쟁국인) 일본과 프랑스는 속으로 아주, 매우 반가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나는 (곧 청와대를) 떠나니까 이걸(원전 사업을) 공식적으로 할 수 없다. 내년 하반기부터 여러 가지로 일이 많을 텐데 걱정”이라고도 했다.
그런 MB는 퇴임 후에도 알 나하얀 왕세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엔 왕세제 초청으로 UAE를 방문하기도 했다. MB는 주변에 “사흘 중 이틀을 왕세제와 함께 보냈다. 바라카 원전 사업은 생각보다 잘 진척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최근 UAE를 전격 방문해 알 나하얀 왕세제를 만난 이유를 놓고 청와대가 아무리 해명해도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적폐청산 수사의 마지막 표적인 MB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많은 MB 주변 사람들이 적폐세력이 된 만큼, 이번 방문이 MB와 무관하다는 청와대의 말을 잘 안 믿는 것이다. 보다 못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2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임 실장의 방문 내막을 잘 아는 그는 “(MB가 타깃도 아니지만) 설사 MB 비리 문제가 있더라도 UAE와의 관계가 손상될 수 있어 (건드리기) 조심스럽다. 빈대 몇 마리(이전 정권 의혹) 잡자고 초가삼간(UAE와의 관계) 태우겠느냐”고 말했다.
임 실장의 진짜 UAE 방문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댓글 의혹 등 MB의 또 다른 적폐 이슈에 대한 수사는 UAE 건과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MB 잡는 것보다 한-UAE 관계 증진이 더 중요하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믿고 싶다. MB가 구축한 UAE와의 네트워크는 적폐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외교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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