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44>아이는 왜 부모가 못해준 것만 기억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7일 03시 00분


자녀에게 말할 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육아 스트레스가 심한 한 젊은 엄마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공부 잘했던 언니, 존재만으로도 귀했던 남동생에게 밀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서러운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친정 엄마가 기억하는 그녀의 어린 시절은 달랐다. 다른 자녀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일화뿐이었다. 친정 엄마가 말한 일화들을 전하자,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라도 친정 엄마가 말하듯 핑크빛은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는 회색빛이었다. 친정 엄마에게 그녀가 아직도 서러워하는 어린 시절의 일화들을 전했다. 친정 엄마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며 억울해했다.

왜 이렇게 기억이 다른 걸까? 우리의 기억은 원래 주관적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한 연구자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싸움 상황을 연출한 후, 10명에게 그 상황을 지켜보도록 했다. 어느 방향에서나 똑같이 볼 수 있도록 했으나, 싸움이 끝난 후 10명이 전한 이야기는 모두 달랐다. 기억이 이렇듯 사람마다 다른 것은, 인지기능이지만 정서와 매우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 기억이 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한다. 일부러 잊어버리기도 하고, 무의식 속에 묻히기도 한다. 종종 왜곡과 변형도 일어난다.

부모가 공부를 안 하는 아이에게 “너 이렇게 해서 대학에 가겠니?”라고 말을 했다. 아이가 이 말에 굉장히 기분이 상했다면, 그 말은 “이따위로 해서 대학이나 갈 수 있겠니?”로 기억될 수 있다. 가끔은 부모가 전혀 하지 않은 말도 한 것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평소 아이에게 “쯧쯧… 네가 할 줄 아는 것이 뭐가 있니?”라는 말을 많이 했다면, 아이는 부모의 “쯧쯧”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 말을 할 때 부모가 주로 짓는 표정만으로도 그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야산을 오르다 보면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간 곳에는 길이 난다. 그 길은 점점 더 다니기 좋아진다. 뇌의 신경회로도 그렇다. 어떤 자극을 자주 받으면 그쪽으로 길이 뚫리고 단단해진다. 그 길은 좋은 쪽도 있고, 나쁜 쪽도 있다. 부모의 표정만으로, 한마디만으로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나쁜 쪽으로 길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길이 어린 나이에 뚫린 사람일수록 부모와의 일상생활의 기억 대부분이 좋지 않기 쉽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누군가 그 길로 가는 작은 단서만 제공해도 다른 형태의 정보들은 무시한 채 오직 그 단서에 따라 언제나 좋지 않게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쯧쯧” 혀 차는 소리 한 번 한 것으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시했다며 욱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은 서러웠다고 하는데, 부모는 그 기억이 전혀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부모는 그 말과 행동을 한 자신의 본심만 기억한다. 대부분 자식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본심보다 그 표현방식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그 지점에서 두 사람의 기억은 또 달라진다.

고3 아이가 공부를 안 하고 있다. 엄마가 “평소에 열심히 하는 거 잘 아는데, 이상하게 고3 엄마들은 애들이 책상에서 멀어져 있으면 불안하고 걱정되더라”라고 말하는 부모의 태도와 “야! 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네가 그럴 때니?”라고 말하는 부모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아이는 부모의 태도에 마음이 많이 상해버린다. 그런데 두 말의 의도는 같다. 엄마는 후자처럼 말해놓고 전자처럼 말했다고 착각한다.

부모가 매번 이런 식이면 아이는 마음에 상처가 깊어져 부모에 대한 분노가 생긴다. ‘왜 나를 못 믿어줄까’ 하는 생각은 해결하지 못한 갈등요소나 취약성이 된다. 이것에 의해서 사건이나 상황은 왜곡 해석이 되기 시작한다. 아이의 기억에 부모의 말투는 더 심하게 왜곡되고, 부모의 의도 또한 여간해서 좋게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고작 그런 걸로 상처를 받느냐고 되묻는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던 출발은 좋은 의도였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다. 하지만 의도가 좋다고 해서 모든 말과 행동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한테 어떤 영향이 가든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의도라면 받는 사람도 그렇게 느끼도록 충분히 좋게 말해야 한다. 편안한 상황에서 좋게 말해야 아이가 부모의 깊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육아 스트레스#왜 나를 못 믿어줄까#부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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