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한국어 교육자 대회’. 격려차 들른 이낙연 국무총리가 ‘칼의 노래’ ‘남한산성’의 소설가 김훈 씨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우연치곤 묘한 인연이었다. 언론인 출신인 두 사람 모두 글쓰기와 말로 일가(一家)를 이뤘는데, 그 유파 또한 비슷하다.
이 총리와 김 씨 언어의 특징은 군살이 없다는 것이다. ‘팩트(fact)’라는 뼈대와 근육만 남기고 지방은 최대한 걷어낸다. 그러다 보니 읽거나 들은 후 궁금증이 별로 없다. 김 씨 글은 혹독한 다이어트를 연상케 한다. 이 총리는 감성이 섞인 군더더기엔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차라리 하늘이 왜 파랗냐고 물어보라.” 10여 년 전 이낙연 당시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건 기자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런 호통을 들었다. 질문이 팩트를 제대로 파고들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하긴 많은 후배 정치인도 이 총리에게 혼났다. 2002년 대선 당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노무현 대선 후보의 부대변인이었다. 대변인이었던 이 총리에게 논평 문안을 보고했다. 이 총리는 쓱 보더니 “나는 이런 표현 안 씁니다”라며 퇴짜를 놨다. 팩트가 불분명했던 게 이유였다고 한다. 씩씩한 김 장관도 ‘멘붕’에 소주잔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아무튼 이 총리의 이런 스타일은 지난해 화제가 됐던 ‘이낙연 어록’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KBS, MBC의 불공정 보도를 봤느냐”는 질문에 “꽤 오래전부터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다”는 ‘팩트 폭격’ 한 방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이 총리 식 ‘뼈대와 근육’의 언어가 새해부터 떠오른 것은 이 총리가 몸담고 있는 집권 세력이 지난해 쏟아낸 언어와 너무 대조적이어서다. 화려하고 감성 충만한데 정작 팩트가 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특히 청와대가 그러했다.
해를 넘긴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을 둘러싼 의혹이 대표적이다. 처음부터 임 실장이 왜 갔는지와 관련한 ‘사실’을 피해가다 보니 궁금증으로 그칠 일이 정치적 의혹으로 커졌다. 청와대가 공개한 팩트는 파병부대 격려→양국 간 파트너십 강화→관계 복원→대통령 친서 전달로 변하더니 이젠 “(파병부대 격려라는) 첫 브리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란 말까지 나온다. 가장 권위 있어야 할 청와대 메시지가 불신을 받게 됐다. 이 총리라면 아예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가 야심차게 준비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프로그램 ‘청쓸신잡’(청와대에 관한 쓸데없고 신비로운 잡학사전)은 그 정점을 찍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방송된 2부의 한 장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 말이다. “외국 정상과 전화로 회담할 때면 특히 유럽 정상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방한한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확대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을 보지 못하면 저는 어떻게 살죠’라고 말했다.” 팩트와 대국민 홍보, 정치적 사탕발림이 뒤섞인 이 말을 당사자인 문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할까.
촛불과 탄핵, 조기 대선으로 이어졌던 지난해는 감성의 언어가 더 많았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젠 이성과 논리의 언어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계속 감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엔 주변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북한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무력을 과시하면서 평창 올림픽을 매개로 한미 양국을 시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에선 이미 ‘북핵 시한부 3개월’ 스톱워치 단추가 눌러졌다. 법조인 출신 문 대통령부터 나서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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