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근무하다 보면 한국과 일본의 일하는 방식의 차이가 피부로 다가온다. 일본은 오랫동안 계획하고 상의하고 준비해 목표를 향해 조금씩 진행해간다. 한국은 꼭 필요한 일만 후다닥, 성과 중심으로 해낸다.
단순 비교하자면 일본이 훨씬 비효율적이고 느리다. 한국이라면 한 사람이 할 일을 두세 사람이 달라붙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생각지 못했던 장점이 드러난다. 기록과 기억 덕이다. 일본은 일의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관계자와 공유하며 공적을 나눈다. 과정을 공유한 사람은 전체 업무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되니 자연스레 후진이 양성된다.
반면 한국은 결과물만 있을 뿐, 그 과정이 공유되거나 기록이 남는 일이 드물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다. 결국 일본에서 일의 경험은 조직의 자산으로 축적되지만 한국은 담당자만 바뀌어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인은 개인기는 뛰어난데 뭉쳐지질 않고 일본인은 개인보다 조직의 힘이 뛰어나다는 해묵은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싶다.
오래 준비하고 공유하며 끝난 뒤 기억하는 접근법은 관계자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갖게 한다. 지난해 여름 일본인 노부부와 함께 서민 식당에 갔을 때, 80대 여주인의 얘기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수도권 직하 지진은 언제든 닥치겠지만, 2020년이 지난 뒤에 왔으면 좋겠어요.”
마침 구마모토 지진 직후라 “30년 내에 도쿄 바로 밑에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70%”라는 예측이 화제였다. 본인은 아무 여한이 없지만 올림픽 때까지는 도쿄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에서, 일본의 보통 사람이 가진 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주인의식이 읽혔다.
말 그대로 2020년 올림픽은 일본 사회 통합의 상징처럼 돼 있다. 올림픽 마스코트 하나 정할 때도 3년 전부터 전국 초등학생의 투표를 거친다. 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2020년을 “내가 마스코트를 뽑은 올림픽”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기억할 것이다.
반대로 코앞에 닥친 평창 겨울올림픽은 주인의식은커녕 막연히 잘되길 바라는 마음조차 결여된 행사로 비쳐 당혹스럽기만 하다.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평창 망했으면 좋겠다”거나 “강원도가 국비를 너무 썼다”는 등 모종의 지역감정마저 읽히는 글들이 눈에 띈다.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될 행사를 준비하면서도 분위기가 뜨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일본인들은 의아해한다. 그간 “최순실 게이트에 엮인 게 하도 많아 다들 질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지만, 안타까운 게 사실이다. 여기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도 참가 의사를 밝히는 등 아무래도 평창은 또 하나의 분단현실을 보여주는 논란의 장이 될 것 같다.
10여 년 전 게이오대에서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민족운동은 다시 ○○계열과 ○○계열로 나뉘고 각기 ○○파, ○○파로 갈라져서”라며 강의하던 교수는 갑자기 부연설명으로 넘어갔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자꾸만 분열됐다. 이는 한국 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분파가 만들어지고 서로 치열하게 싸운다.”
당시에는 수업 내용에 분노했다. 하지만 항상 분열되고 진영논리에 빠지며 뺄셈만이 작동되는 한국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지나친 지적도 아니지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한국을 두고 일본의 지인은 “한국의 가장 큰 적폐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이 공유할 소중한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사회 통합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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