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교수는 1990년대 중반 전 세계 중도 좌파가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제3의 길’은 학문적인 접근으로 시작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방향을 잃은 중도 좌파 진영에 자본주의의 장점을 접목시키면서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미국 민주당 빌 클린턴, 독일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사회민주 계열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중도 좌파를 뒤덮고 있던 빛바랜 누런 사회주의의 색채를 빼낸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로부터 20년. 전 세계 중도 좌파 계열은 선거마다 패배하며 몰락했다. 기든스 교수를 최근 만나 ‘제3의 길’이 여전히 유효한지 물었다. 그는 “지금 우리는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빠른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디지털 혁명 속에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포퓰리즘의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새로운 진보’를 좇아 온 그의 여정은 막혀 있는 듯했다. 한국에 그 해법을 찾아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3의 길’ 때까지만 해도 양대 이념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됐다. 그러나 지금 포퓰리즘은 정형화된 이념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정당 정치가 무너지면서 기든스 교수는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그에게 기존 양대 정당인 공화당과 사회당이 몰락하고 에마뉘엘 마크롱과 마린 르펜이 결선 투표에서 맞붙었던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시장 주도형 신자유주의와 국가 주도형 사회주의가 뒤섞인 공약을 내걸었다. 기존 사회당 지지층도 나뉘었다. 그는 “마크롱 대통령은 정당이 아닌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고 당선된 것이라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정치”라며 “그가 성공할지 아직 모르겠다”고 조심스러워했다.
현재 유럽 정치의 양대 축은 더 이상 신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가 아니다.
일자리로 대변되는 경제 성장과 난민·테러로 불안해진 사회 안전 분야, 두 축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증을 정치가 뒤쫓는 형국이다. 그 사이 이념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공화당이든 사회당이든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기업 투자를 유치해야 한다. 사회 안전망을 확충해 양극화를 줄여야 하고, 내 삶에 위협이 되는 테러와 폭력을 막아내야 한다.
유럽에 비해 여전히 한국은 이념이 선거와 정책에서 중요하다.
박근혜 정권은 보수 우파의 이념을 중시했다. 끝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막았다. 좌파 성향 문화계 인사의 힘을 빼려 했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반발을 무마하느라 정작 노동개혁, 공무원연금 개혁, 창조경제 등이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념은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그러나 종종 사회를 분열시킨다.
유럽의 신년 메시지는 통합이었다. 프랑스 마크롱도, 독일 메르켈도, 영국 메이도 모두 사회 통합을 외쳤다. 이념이 아닌 국민이 원하는 일자리와 사회 안전을 외쳤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적폐청산도 이념 분야까지는 들어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념으로 회귀한 대립은 사회를 분열시킬 뿐 아니라 격변의 시대에 맞지도 않다. 우리는 세계 석학인 기든스 교수도 좌표를 찾기 힘든,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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