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5월일까, 6월일까. 여름날 아침 그는 교토 남쪽에 있는 우지(宇治)강으로 도시샤대 친구들과 놀러 갔다. 점차 아침 물안개가 걷히며 짙은 에메랄드빛을 튕겨내는 강물은 물살이 빠르고 깊어 보였다. 강가에는 이른 아침인데 벌써 강태공들이 여기저기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우지교를 건너 20분쯤 걸어가면 아마가세(天ヶ瀨)댐 아래 통나무를 밧줄로 당겨 만든 구름다리, 일본어로 쓰리바시(吊り橋)가 있다. 이 다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의 사진 속에 그는 마지막 사진일 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있다.
일본 친구들 앞에서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윤동주가 좋아하는 노래는 ‘희망의 나라로’, 일본 동요 ‘이 길(この道)’, ‘도라지’ 등 많았다. 갓 사귄 일본인 친구들 앞에서 ‘산타루치아’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면 멋졌을 텐데, 하필 ‘아리랑’을 불렀을까. 뻔한 애국 영화의 상투적인 마지막 장면 같지만, 그가 그날 거쳐 갔을 행선지를 생각하면 ‘아리랑’을 불렀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녹차로 유명한 우지시에는 일본 고전문학 ‘겐지 이야기’ 유적지가 있고, 일본 돈 10엔 동전 뒷면에 그려진 불교 사원 뵤도인(平等院)도 있다. 일본 정신과 문학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우지역에서 아마가세 다리까지 오려면, 뵤도인을 거쳐 20여 분 걸어 와야 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곳을 지나치며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을 낳은 탯줄을 노래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의 영혼을 위로할까 싶어 ‘아리랑’을 부르려 했으나, 이번에도 ‘…고개를’까지 부르고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마가세 현수교에서 사진을 찍었던 그는 한 달 후 7월 14일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다리에서 댐 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일본 시민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세운 높이 약 2m, 폭 1.4m의 시비가 있다. 그가 연희전문대 학우회지 ‘문우’에 발표한 시 ‘새로운 길’이 자필로 새겨져 있다.
다음은 1942년 10월 도시샤대에 편입한 후, 1943년 7월 14일 체포될 때까지 9개월여간 머물렀던 다케다(武田) 아파트 터를 찾아가 보자. 조선인 유학생 70여 명이 하숙했던 꽤 큰 하숙집이었다. 교토조형예술대 내에 윤동주 하숙집 터가 있다고 해 정문 근처에 가서 찾으면 낭패다. 정문 맞은편 2차로 도로 쪽으로 1km쯤 들어가면 있는 유치원 맞은편 교토조형예술대 다카하라 캠퍼스 도로 곁 작은 꽃밭에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여기서 4km 정도 걸어가면 도시샤대가 있다. 여기서 그는 가모가와 천변을 걸어 학교로 갔을 것이다. 내가 유학할 때도 집 앞에 천이 있었는데 잉어가 있고 벚꽃이 피고, 무엇보다도 도로와 떨어져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어 늘 천변을 걸어 학교로 가곤 했었다. 가모가와 천변에는 오리, 갈매기, 왜가리 등 온갖 새가 떼로 혹은 외로이 날아다닌다. 강은 저들에게 다양한 물고기며 온갖 벌레가 반찬으로 놓인 밥상일 것이다. 그의 통학길을 더듬어 걷다 보니, 그가 원고지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 ‘봄’이 떠올랐다.
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1942년 릿쿄대 편지지에 쓴 작품이지만, 그의 삶 근저(根底)에 흐르는 안간힘이 빛난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라는 구절은 얼마나 힘찬가. 내 혈관 속에 흐르는 봄은 겨울을 견뎌온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을 살려낸다. 그에게 석 달의 겨울, 삼동(三冬)은 무엇이었을까. 자기 고민과 일제의 억압일까. 석 달의 겨울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말은 어떤 어둠에도 굽히지 않았던 질긴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즐거운” 종달새에게 어느 이랑,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웁게” 솟구쳐 날아오르라는 그의 시에는 내명(內明)한 명랑성이 있다. 다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푸르른 하늘은/아른아른 높기도 한데”라며 말줄임표를 붙인 것은 표현 못할 아마득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다짐을 반복하며 하숙집 터에서 강변을 도시샤대 쪽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시모가모(下鴨) 경찰서가 보인다. 그는 알았을까. 통학길에 있던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자기가 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취조 받을 줄, 꿈에도 몰랐겠지. 얼마나 황당했을까.
“곧 얼마 후면 나가겠죠. 걱정마세요.”
면회 왔던 윤영춘(가수 윤형주 아버지)에게 웃으며 답했다잖은가. 경찰서 앞에서 사진 찍고 웅성거리면, 당연히 일본인 경찰 두어 명이 나온다. 놀라지 말고 천천히 “윤동주 시인”이라고 한국어로 말한다면 경찰이 끄떡이며 답할 것이다.
“아하, 윤도옹주우 시진데스네(윤동주 시인이군요)”라며 윤동주 시인 시비가 있는 도시샤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1.5km쯤 내려가라고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내가 일본인 경찰과 대화한 내용이다. 이렇게 친절한 시모가모 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44년 6월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2월 옥사했다.
마지막 사진에 마지막 노래로 ‘아리랑’을 부르는 너무 뻔한 결말은 거부할 수 없는 신화적 환상을 일으킨다. 우지강가에 세워진 시비 뒷면에 써 있는 구절이 자꾸 생각난다.
“2004년 유엔이 5월 8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추도와 화해의 때’로 결의했다. 우리는 이 결의를 존중하여 자기실현의 길이 막혔던 시인 윤동주가 살았던 증거를 미래에 전하기 위해, 시 ‘새로운 길’을 새긴 비석을 이 땅에 세운다.”
그에게 ‘아리랑’은 절실한 희망의 기도였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 NHK에서 아베 신조 정권은 한국에 위안부 합의 이행을 독촉하고 있었다. 아직 혼동 속에서 윤동주를 기억하며 한국과 일본의 시민은 찰나의 권력을 뛰어넘어 영원한 평화를 희구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너무도 뻔하고 사소한 결말이 때로는 소름 돋도록 사무친다. 비루한 운명에 맞서는 우직한 노래 앞에서, 나도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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