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여기로 온 뒤로 한술의 밥이나 한 모금 물도 다 적에게 나온 것인즉, 설령 적이 신을 죽이지 아니한다 해도 신이 차마 구복(口腹) 때문에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기에 식사를 거절하고 옛사람의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부끄럼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 삼천리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최익현 ‘국역 면암집’의 ‘유소(遺疏)’》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내는 고전국역총서 124권째가 ‘면암집’ 제1권이다. 최익현의 시와 상소문과 서간문이 실려 있다. 최익현이 장장 50년 동안 고종을 훈계하고 비판한 상소문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목숨을 걸고 쓴 것들이 많고 상소문의 과격함 때문에 귀양도 두 번이나 갔다. 이항로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면암(勉菴)’이라는 호를 받는다. 벼슬하려 애쓰지 말고 암자에 들어가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열심히 학문하라는 뜻이다. 최익현은 스승이 지어준 호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 스물두 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 살아가면서 높은 벼슬아치에게 굽실거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에게도 예를 갖춰 대했다. 서른여섯 살 때 사헌부 장령이 되자 그 당시 17세인 고종의 아버지로 권력을 휘두르던 대원군의 폭정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경복궁과 경회루 공사에 동원된 백성에게 노임도 제대로 안 주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따져 묻는 내용이었다.
5년 뒤에는 국정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정에서는 지금 아첨하는 사람이 출세하고 곧은 선비는 물러가며 세금 거둠이 쉴 새 없어 백성들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사기가 떨어지고, 공정함을 요구하는 자를 괴이하다 하고, 개인 욕심을 내는 이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는 어린 고종과 고종 뒤에서 국가권력을 좌우하는 대원군을 향해 쓴 이 상소문으로 최익현은 3년 동안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한다. 하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유배 보내는 것과 함께 대원군을 궁궐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왕권을 비로소 확립한다.
제주도 유배를 마치고 와서도 상소문을 올린 뒤 내 말이 틀린 거라면 목을 자르라고 도끼를 옆에 놓고 궁궐 앞에서 시위를 벌이지 않나,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소서’에서부터 ‘중국이나 일본에 의존하려는 이를 경계하소서’까지 12조의 시무책을 올리지 않나, 사사건건 왕의 실정을 비판하고 친일파의 권력 장악을 경계한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때 나이 일흔셋, 손자 재롱을 보며 지내도 되는데 그는 왜 8도에 포고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 총수가 되었을까.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권의 향방을 보며 이합집산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이 진실로 국민의 행복을 생각하는 분들일까. 쓰시마섬에 끌려가서 곡기를 끊고 죽음에 임박해 쓴 최익현의 유서를 보며 눈물짓는다. 글씨 쓸 힘이 없어 구술하였고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이 받아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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