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일본을 여행한 지인이 ‘서점에서 말도 안 되는 책을 발견했다’며 e메일을 보내왔다. 미국인 변호사 켄트 길버트가 쓴 ‘유교에 지배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의 비극’(고단샤)이 ‘베스트셀러’라며 대형서점 한가운데 진열돼 있더라는 것이다.
책에는 “중국 한국을 상대하려면 먼저 ‘자기중심주의’가 핵심인 유교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거나 중국 한국을 싸잡아 “금수 이하의 사회도덕과 공공의식밖에 갖고 있지 않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눈 깜짝 안 하고 거짓말하는 한국인”, “중국 한국이 허위 사실인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로 무사도 정신의 나라 일본을 깎아내리고 있다”는 식의, 이웃나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내용이 담겨 있다. 초판의 책날개에는 ‘그들은 일본인과 종이 다르다’고 쓰여 있었다.
사실 지난해 일본 서점가에는 ‘2차 혐한류’라 할 만큼 한국 비판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전직 주한국 대사, 일본 언론의 현직 서울특파원이 ‘헬조선’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커밍아웃했다.
이에 대해 기자는 그동안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변방에 우짖는 새’에 불과한 이들에게 발끈하며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일본에서는 ‘한국 미디어가 비분강개한 책’은 거꾸로 선전문구가 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유교에 지배당한…’은 어느 틈에 47만 부가 팔려 2017년 연간 베스트셀러 종합 6위, 신서 논픽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변방에 우짖는 새’가 아니라 여론의 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이 본 자국 얘기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인기를 끈다. 타자의 눈을 통해 자신들의 현주소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살리면 자성과 통찰의 기회가 된다.
‘유교에 지배당한…’의 저자는 1980년대부터 일본 방송에서 그런 역할을 하던 연예인 겸 저술가였다. 처음에는 일본 찬양에서 출발했다. 그가 펴낸 ‘켄트 길버트의 소박한 의문―신기한 나라 일본’(1998년), ‘불사조의 나라 일본’(2013년) 등은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게 된 서구인의 얘기다. 이런 그가 최근 들어 일본 우익의 입맛에 딱 맞는 발언을 주도하고 있다. ‘전향’의 계기는 2015년 우익 성향인 아파그룹이 운영하는 아파일본재흥재단의 ‘진짜 근현대사관 현상 논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인 듯하다. 논문 제목은 ‘일본의 (성실한) 국민성이 외교 국방에 미치는 악영향’.
그는 이후 한두 달에 한 권꼴로 책을 내고 있다. 도저히 한 사람이 쓰는 거라고 볼 수 없는 분량의 책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일본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일본은 패전에 의한 자학사관과 평화국가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 상징인 헌법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며 일본 우익의 ‘모범답안’을 미국인인 그가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행태가 확실히 돈벌이는 되는 듯하다. 그는 대형 영어학원 등 일본에서 벌인 몇 가지 사업이 실패했고, 그 사업 과정에서 우익계 인사들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저술 수입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권당 인세가 100엔씩이라고만 쳐도 50만 부가 팔리면 5000만 엔, 우리 돈으로 약 5억 원이다.
‘유교에 지배당한…’을 펴낸 고단샤 담당자는 “서구인의 시각에서 쓴 반중 반한 서적이기에 많은 일본인이 받아들이는 것”이라 설명한다. 외국인의 아부 발언에 의존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역으로 내면의 공허함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남을 깎아내려서 만족을 얻는 것은 소아기적 행태에 다름 아니다. 그 퇴행성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적어도 한국은 이웃나라를 폄훼하는 ‘헤이트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는 나라가 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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