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감기에 걸려 아픈데 다섯 살 민철이는 약속대로 눈썰매장에 가자고 조른다. 아파서 못 간다고 하니 약 먹고 가면 안 되느냐고 한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엄마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만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에 생각보다 많은 부모가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아이가 나와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는 만 7세가 넘어서다. 물론 이보다 빠른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이맘때 자기 생각만 한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은 만 7세가 훌쩍 넘어서도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능력, 즉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이 많이 부족한 아이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은 자칫 자기중심적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입장을 바꿔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에 대해 여러 번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아직은 인내심이 부족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이런 친구가 경계 대상 1호가 되기도 한다. 의외로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 중에서도 이런 아이가 적지 않다.
역지사지 능력은 꾸준히 훈련을 하면 충분히 키울 수 있다. 평소 아이의 주변 사물이나 관심사를 중심으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양하게 바뀐다는 것을 경험시켜 주면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앞에서 보는 것, 위에서 보는 것, 옆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또 누군가에게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다. 이런 점을 두런두런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좋다.
신문이나 방송 기사를 읽거나 보고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사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나 첨예한 견해차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화제나 내용을 부모가 요약해서 들려주고 고학년이라면 아이가 직접 탐독하게 한 후 부모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식으로 하면 된다. 부모는 의견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아이가 공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방송과 언론에서 연이어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서 각계 전문가들이 각각 어떤 근거를 가지고 원인을 진단하는지, 검증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의혹들은 무엇인지, 서로 다른 주장이 오가는데 여기에 어떤 논리의 허점이 있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들의 애절한 슬픔을 함께 느껴보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해 보기도 한다. 아이는 이 과정을 통해 상반된 시각에 따른 생각을 비교하고 비판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이 생기고 가치관이 자란다.
가족회의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족 현안을 놓고 “아빠의 의견은 이러한데 너는 어때?”라고 물으며 가족이 돌아가면서 말하는 기회를 만든다. 아이가 감정적으로 격분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발 물러서서 보는 연습을 할 수 있다.
형제간의 다툼도 역지사지의 능력을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툰 두 아이에게 반성문을 쓰게 한다. 이 반성문은 흔히 쓰는,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이에게 “무엇 때문에 네가 화가 났는지 써 봐. 네 생각에 형(동생)이 잘못한 점이 무엇인지 그것도 써 보도록 해. 너도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이렇게 하지 말걸’ 하고 조금이라도 후회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적자. 만약 다음에도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적어 볼래?”라고 말해준다.
다 쓴 다음에는 서로 바꾸어 읽어 보게 한다. 상대의 반성문을 집어 든 아이들은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쑥스러워하고 싸울 당시에 형제의 마음과 입장이 각각 어떠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덧붙여 서로의 장점도 쓰게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그래도 형(동생)에게 좋은 점도 있을 거야. 예전에 잘해줬던 점이나 장점들도 써 봐.” 아직도 기분이 언짢은 상태라 툴툴거려도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컴퓨터를 먼저 쓸 수 있게 해줬다거나 하는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꼬인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인간관계를 배워 나간다. 그리고 형제와의 관계에서는 해결 과정을 배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