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밀양 참사 현장서 빛난 시민정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00시 00분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 당시 2층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숨질 때까지 시커먼 연기 속을 헤치고 다녔다. 환자들에게 “입을 가리고 대피하라”고 소리를 쳤다. 정작 자신의 입은 가리지 못했다. 최초로 불이 붙은 1층 응급실에서는 당직 의사가 사투 속에 목숨을 잃었다. 의사는 소화기를 분사하며 불을 꺼보려다가 화마(火魔)를 피하지 못했다. 다른 병원에 근무하며 아르바이트로 선 당직이었지만 환자를 두고 빠져나오지 않았다.

5층 치매노인 병동은 자칫 더 큰 ‘참변’을 부를 수 있었지만 사망자가 없었다. 58세의 요양관리사는 노인들에게 수건을 나눠줘 입을 막게 한 뒤 차례로 대피시켜 기적을 만들었다. 그는 연기를 많이 마셔 구조 직후 입원했다. 38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친 참사였지만 환자의 생명을 먼저 살핀 의료진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그나마 인명 피해를 줄였다.

위기의 순간 십시일반으로 구조 활동을 벌인 밀양 시민들의 활약도 빛을 발했다. 병원 주위는 독한 냄새와 매캐한 연기로 자욱했다. 하지만 창문으로 “도와 달라”고 손을 흔드는 환자를 목격한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췄다. 이들은 소방대원을 도와 소방슬라이드를 붙잡고, 내려오는 환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켰다. 영하 10도의 강추위에 얇은 환자복만 입은 환자들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혀주기도 했다. 인근 주민들은 이불과 핫팩을 들고 나왔다. 화재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온 보호자들도 구조 현장에 뛰어들었다. 생사를 가르는 현장에서 다른 환자들을 내보낸 뒤 뒤따라 탈출한 환자도 있었다. 한 사람의 손길이라도 더 필요할 때 시민들은 먼저 나서 구조에 힘을 보탰다.

빈소를 꾸릴 공간이 20여 곳에 불과한 소도시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로 밀양은 도시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한 달여 만에 발생한 참사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비통해하고 있다. 열려 있던 방화문, 접근이 어려운 비상구 등 대형 화재 때마다 지적된 안전관리 부실이 이번에도 되풀이돼 무력감마저 든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의료진과 이웃을 내 가족처럼 돌본 시민들이 한 줄기 빛으로 느껴진다. 이들의 시민정신이야말로 사회의 든든한 바탕이다. 고통과 위기 속에 발휘된 튼튼한 공동체의식이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밀양 참사#세종병원 화재#시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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