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버지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집에서 10년 넘게 구독하던 한 일간지를 바꿔본다고 발표하셨다. 내가 고려대에 입학한 1965년 3월의 일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인창고 2학년 때 뒤늦게 농구를 시작한 나는 장신(192cm) 유망주로 주목받으며 한국은행과 고려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동시에 받았다. 한국은행이 유력했지만 당시 고려대 유진오 총장과 동문들이 고려대 출신인 한국은행 김세련 총재를 설득해 진로가 바뀌었다. 고려대와 동아일보는 모두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만든 같은 뿌리. 고려대에 입학한 만큼 동아일보를 봐야 한다는 게 아버지 설명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1970년대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54년째 독자다. 내가 홀로 모시다 2013년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매일 동아일보 1면부터 마지막까지 정독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머니가 남겨 주신 몇 권의 내 기사 스크랩북은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 며칠 전 여동생에게 나중에 영정 사진용으로 2년 전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 실린 내 얼굴 그림을 써달라고 말했다.
대학 2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나는 1969년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이듬해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이끌었다. 두 번 모두 한국 농구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67년 한국 여자 농구가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냈다. 호외 2면에는 내 기사도 실렸다. 악착같은 내 수비에 브라질 선수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퇴장당하면서 한국 남자 농구가 처음 결승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대학 졸업 후 산업은행 농구팀에 입단했을 때 나는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옆 작은 여관에 방을 얻어 생활했다. 합숙훈련이 없으면 을지로입구에 있는 은행에서 근무했는데 출근 전 남산 꼭대기 팔각정까지 뛰어가 운동을 했다.
은퇴 후 1975년 고려대 감독에 부임한 뒤 1997년까지 22년 동안 일하며 49연승을 포함해 통산 500승 넘게 기록했다. 이충희 임정명 전희철 현주엽 등 제자들의 활약상이 실린 지면을 볼 때면 내 기사보다 더 흐뭇했다.
현역 시절 동아일보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해준 교과서였다. 지도자가 된 뒤 선수들에게 신문을 자주 접하고 사설 읽기를 강조했다.
내겐 안방과 같은 농구장에 얽힌 애환도 있다. 대학 입학 후 고려대에는 실내농구장이 없어 배재고 보성고 등 주변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대학 4학년 때 비로소 체육관이 완공돼 집 없는 설움에서 벗어났다. 2006년 국내 대학 최대 규모(8057명)인 화정체육관이 고려대 안에 개관해 감개무량했다. 체육관 건립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지내신 고 화정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화정체육관은 고교농구에도 문호를 개방해 꿈나무 육성의 터전이 됐다. 고려대 감독 시절 나를 자주 불러 불고기를 사주시며 격려하셨다. 언젠가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뜯지 않아. 박 감독도 그래야 해”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프로팀의 감독 영입 제의에도 고려대를 떠나지 않았고, 살면서 무엇보다 의리를 중시한 데는 회장님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1970년대만 해도 운동복 차림으로 벤치를 지키는 농구 지도자가 많았다. 난 1976년 국내 코트에서 처음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팬들과 미디어에 주목받는 공인인 만큼 예의로 여겨 한 건데 좋게 봐주셨다. 동아일보 패션 면에까지 등장했다. ‘코트의 신사 박한 감독. 더블재킷에 고상한 콤비’라는 제목의 근사한 기사였다.
‘무량대주(無量大酒)’라는 표현을 써가며 나를 농구계 대표적 주당으로 알린 것도 동아일보가 처음이다. 나와 호기롭게 술 대결에 나섰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하나둘 슬며시 사라지던 장면도 떠오른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는 어느덧 고희를 넘겼다. 농구를 평생 반려자로 여겼다. 농구 지도자는 고려대에서만 했다. 1980년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 입주한 뒤로는 이사 한 번 한 적이 없다. 한눈팔지 않고 내 이름처럼 한길을 걸었다. 그 곁에는 영원한 벗 같은 동아일보가 있었다. 3만 호 시대를 맞아 더 많은 동반자가 쏟아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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